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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관계 - 해당되는 글 3건


남북관계가 천안함 사건 등으로 경색되고 있으며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 한반도 상황이 어떻게 흐를지 모르는 상황에서 주변국의 대한반도정책은 복잡해지고 있는 양상이다. 2010년은 625발발 60주년, 419혁명 50주년 등으로 다양한 이해단체들이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만, 모두 과거에 얽매여 있고, 막상 대한민국의 미래를 향한 대안제시를 하지는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이 글은 송종환 명지대 북한학과 초빙교수가 2010년 6월4 자유민주연구학회가 주최한 6.25 60주년 기념 세미나에서 발제문으로 발표한 것을 소개한다. 625를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글이 아닌가 싶다.

 

<6.25 60주년기념 특집>

 

공산권 자료로 본 6·25 전쟁 재평가(6): 러시아 측이 공개한 비밀문서를 중심으로*

6. 한국전쟁 60주년의 교훈

이번 북한의 기습 어뢰공격은 60년 전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환기시켜주고 실감케 했다. 그리고 한국은 6·25 당시처럼 방심하는 사이에 또 북한의 군사적 도발을 당한 것이다.

2007 12월 제17대 대통령선거에서 ‘햇볕정책’을 심판한 대다수 국민들의 지지로 2008 2월 정권이 교체되고 북한의 어뢰공격으로 천안함이 폭침되었음이 밝혀졌는데도 북한의 ‘우리 민족끼리’ 주술에 홀려 해이해진 국민의 안보의식과 군의 기강은 쉽게 고쳐지지 않고 있다.

5 20일 미국, 영국, 호주, 스웨덴 조사단까지 포함된 민군합동조사단이 북한 소행에 대한 ‘결정적 증거’를 발표하자 외국 정부들도 놀라울 정도로 과학적·객관적이라는 평가를 하고 5 24일 이명박 대통령이 대국민담화에서 대북제재를 천명한 이후에도 한국 사회에서는 조사결과의 의혹을 제기하고 이를 선동하는 부류들이 여전히 활개를 치고 있다.

한반도는 공산군의 남침으로 개시된 전쟁으로 많은 인명과 재산상의 피해로 잿더미가 되었지만 한국은 전쟁이후 1954년 한국헌법이 ‘균등경제’에서 ‘시장경제’ 중심으로 개정되어 오늘날 한국의 경제적 발전과 전쟁 전의 유약성을 극복하는 기회가 되었다. (67)

또한 러시아 측이 공개한 문서를 통해 스탈린이 한국전쟁 개시 승인, 전쟁 진행 및 지원과 종전, 중국 참전 유도의 핵심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하여도 한반도 공산화 통일을 위한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공산 집단의 거듭된 남침전쟁 개시 요청의 책임이 가벼워지지는 않는다.

천안함을 공격한 김정일의 의식은 60년 전 김일성의 의식과 달라진 것이 없다. 한반도공산화 통일을 노리는 김정일 수령유일지배체제가 지속되는 한 북한의 핵무기, 탄도 미사일, 생·화학 무기, 장사정포, 특수부대와 잠수함() 등 비대칭 전력에 의한 선제공격과 속도전, 침투·국지도발은 계속될 것이다.

5 24일 이명박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에서 대북심리전 재개를 발표하자 북한은 즉각 “심리전 수단을 없애기 위한 조준 격파사격이 개시될 것”이라고 위협한 후 인민군과 전 예비병력, 보안기관에 전투태세 돌입을 명령하고 26, 27일 연일 개성공단 폐쇄 으름장을 놓고 있다.

한국군은 당면한 북한의 군사적 도발에 의한 일촉즉발의 비상상황에서  북한이 도발 하면 즉각 응징, 보복하는 태세로 전환하였음을 내외에 선포하고, 앞으로 주적(主敵) 개념을 분명히 하면서 국방예산을 대폭 증액, 국방력을 강화하여 북한에 대한 실질적 억지력을 증강하고 한미연합방위태세를 보다 긴밀히 해나가야 한다.

한국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미국과의 군사동맹을 긴밀히 하기 위하여 2012년4월 17 한미연합사 해체 연기를 요구하고 이를 지렛대로 하여 북한에 대한 중국의 적극 역할을 유도해야 한다. 일본, 러시아 등 인접 국가 및 유엔과 공조하는 양자 외교와 다자 차원의 외교를 강력히 전개하여 핵·미사일 등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개발과 대남 군사적 도발을 억지하는 국제공조체제를 강구하여야 한다.

1992 8월 한·중 수교이후 인적, 물적 교류·협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지만, 천안함 폭침 이후  5월 말 방한하여 이명박 대통령과 가진 양자회담과 한중일 3국 정상회담에서 보인 원자바오() 총리의 태도처럼 북한을 감싸는 중국의 입장은 쉬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은 지금과 같이 계속되는 북한의 군사도발이 동북아는 물론 세계 평화와 중국의 번영에 큰 부담이 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중국에 계속 전해야 한다. 60년 전 스탈린과 같이 중국이 자신의 이익과 전략적 목표만을 위하여 다른 나라를 이용하는 어리석음을 되풀이 하지 않도록 요구하여야 한다.

한국은 중국이 북한을 잃고 싶지 않은 ‘골목대장’이나 식탁에서 숟가락으로 달가닥 거리면서 보채는 아이를 보는 부모의 자세보다 미국과 함께 지금의 정치, 경제력에 상응한 G2 국가로서 세계 평화와 국제협력을 위해 리더십을 발휘해 줄 것을 촉구해야 한다. 한국은 중국이 ‘북·중 혈맹의 냉전적 사고’에 매달리지 말고 2008 5월 체결한 ‘전략적 협력 동반자’인 한국에 당연히 할 의미 있는 역할을 할 것을 요구하여야 한다.

항후 남북한 관계가 재개되더라도 긴장완화·평화정착과 교류·경제협력이 병행 추진 되어야 하며, 특히 민간 기업이 주체가 되는 후자는 기업 스스로의 수익과 위험 판단 하에 시장경제와 글로벌 표준에 맞도록 정상화하여야 한다. 개성공단의 한국기업인의 경영 회복 및 통행·통관·통신 확보와 금강산관광의 국고보조금지와 위험지역 고지 등이 그러한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이번 북한의 군사도발을 계기로 대한민국 국민은 다시 60년 전과 똑 같은 북한의 정체를 재인식, 안보의식을 확립하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 인권존중과 같은 핵심가치에 입각한 올바른 통일 구현을 확신하는 대북정책과 자세로 통일을 주도해 나가야 한다. 60주년이 되는 6·25 전쟁을 상기하면서 그렇게 자세를 가다듬는 것만이 이번에 희생된 46명의 넋을 위로하고 북한의 각종 도발과 전쟁을 끝내고 평화와 통일을 앞당기는 길이 될 것이다.

국가안보에는 여야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이제 대한민국이 ‘햇볕정책’을 청산하고 결집된 의지로 하나가 되어 새로운 각오와 결연한 행동을 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발표를 줄인다. (연재 끝)

 

<필자 주>

67) 박명림, “한국전쟁과 헌법의 변화,” 역사문제연구소·포츠담현대사연구센터, 『한국전쟁에 대한 11가지 시선』(서울: 역사비평사, 2010), pp. 88-118.



남북관계가 천안함 사건 등으로 경색되고 있으며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 한반도 정황이 어떻게 흐를지 모르는 상황에서 주변국의 대한반도정책은 복잡해지고 있는 양상이다. 2010년은 625발발 60주년, 419혁명 50주년 등으로 다양한 이해단체들이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만, 모두 과거에 얽매여 있고, 막상 대한민국의 미래를 향한 대안제시를 하지는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이 글은 종환 명지대 북한학과 초빙교수가 2010년 6월4 자유민주연구학회가 주최한 6.25 60주년 기념 세미나에서 발제문으로 발표한 것을 소개한다. 625를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글이 아닌가 싶다.

 

<6.25 60주년기념 특집>

 

공산권 자료로 본 6·25 전쟁 재평가(2): 러시아 측이 공개한 비밀문서를 중심으로*

 

2. 스탈린의 결단·승인·작전계획에 따라 김일성 남침 개시

1992년부터 러시아 측에 의하여 공개된 세 가지 종류의 한국전쟁 관련 비밀문서들은 한국전쟁이 남한의 북침에 대한 북한의 반격이라고 되풀이해 온 구 소련과 북한 측의  주장이  거짓 선전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스탈린에 의하여 계획되고 소련 군사고문관들이 작성한 군사작전계획에 따른 북한 측의 남침이며 김일성의 역사적 결단에 의한 전쟁이 아니라 스탈린의 전쟁임을 밝혀 주고 있다. , 김일성이 남침 전쟁의 승인을 수차례 스탈린에게 요구하고 그의 승인을 득한 후 남침전쟁의 주연을 맡았지만 전쟁 개시나 그 시기가 김일성의 뜻에 의하여 결정되지 않았다

1997 7 14자 뉴스위크지는「역사의 교훈 제2장」제하 특집기사에서 중국 공산당의 공식 기관지인 「百年潮流」가 지난 40년간 중국 공산당이 고수해온 남한에 의한 북침 주장을 포기하면서 “한국전쟁은 스탈린이 주도하였고 김일성 2주안에 남한을 점령할 수 있다고 믿은 과격주의자였으며 마오쩌둥은 여기에 동조했다고 기술하였다”고 보도하였다. 또한 동 기관지는 마오쩌둥의 한국전쟁 참전결정을 비판하면서 “한국전쟁은 지금까지 중국이 주장해온 것처럼 영광스러운 승리가 아니라 스탈린의 수중에서 놀아나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실익(實益)을 침해한 대실수였다”고 주장하였다.(6)

스탈린은 소련 주도로 한반도 북반부에서 공산화체제를 구축하고 있었지만 1950 1월까지는 세계 제2차 대전 기간 중 미국 등 연합국과의 합의에 의하여 정한 경계선을 넘어 남한에까지 적극적으로 소련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 오히려 무력에 의하여 통일을 성취하려는 북한 지도자들의 주장을 거부하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옐친대통령이 1994 6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영삼 대통령에게 제공키 위하여 한국전 개전에 관하여 정리한 216건의 『한국전쟁 관련 러시아 외교문서』에 의하면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무력통일을 위한 대규모 남침의사를 최초로 밝힌 것은 1949년 3월 5 모스코바에서의 스탈린 김일성 간 회담에서 김일성이 무력통일을 위한 남침에 대한 소련 지도부의 의견을 문의하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이 때 스탈린은 한국군과 한국 주둔 미군규모, 남북한 군대의 우열을 질문한 후 북한군이 절대적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답변하고 남한에 미군이 아직도 주둔하고 있음(소련군은 1948 12월 북한에서 철수)과 미·소간 38선 분할에 관한 합의를 상기시켰다또한 스탈린은 북한의 남한에 대한 공세적 군사 활동은 남한의 북한 침공을 반격하는 경우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남침을 승인하지 않았다.(7)

북한은 1949년 8월 4 새벽 5 최현의 지휘 하에 두 개 연대 병력과 포병부대를 동원하여 옹진반도의 두락산, 운동, 국사봉을 공격하는 대규모 38분계선 분쟁을 일으켰다.(8) 이어서 북한은 8 12김일성·쉬티코프(Shtykov) 대사 면담과 9 3김일성의 러시아어 통역관 문일·툰킨(G. I. Tunkin)공사 면담 시 1949 7월 남한에서 미군이 철수한 후 38선은 이미 그 의미가 상실되었다고 하면서 대남 전면 공격과 최소한 옹진반도 점령 계획을 제시하였다.(9)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스탈린은 9 11김일성의 요청이 대부분의 주한미군이 철수한 시점에 제기되었음을 감안하여 호의적 관심을 보이면서 휴가 중인 쉬티코프 대사를 대리하고 있던 툰킨 공사가 김일성을 조속히 면담, 8 12일 및 9 3일자 북한 측 제의 사항과 관련하여 남북한의 정치 군사정보와  현지 대사관 의견을 보고토록 지시하였다.(10)

9 14일자 전문  보고 시  툰킨 공사는 9 12일과 9 13김일성과의 면담 시 김이 종전과는 달리 확신을 주지 못하는 어조로 현 상황에서 속전속결에 의한 승리는 기대할 수 없으므로 전면전을 조기에 개시하는 대신 옹진반도와 해주 인근까지를 점령할 것을 제의하였다고 보고하였다아울러 동 공사는 인민군이 남침 시 남한 내 빨치산의 지원을 받는다고 하여도 신속히 승리할 만큼 강하지도 못하고 미국의 강력한 군사개입으로 전쟁이 장기화될 것이므로 남침이 시기적으로 적절치 않다는 현지 대사관 의견을 보고하면서 옹진반도 점령과 같은 제한적 작전 수행이 내전으로 확대되지 않더라도 이는 미국의 성공적 반소 캠페인에 이용되어 소련에 유익하지 않으므로 가치가 없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11)

이러한 평양주재 대사관의 보고를 받고 스탈린은 소련공산당 중앙위 정치국 명의로 9 24일 평양주재 대사에게 하달한 훈령에서 남한 내 빨치산 활동 강화계획은 승인하되, 전면적 남침이나 옹진반도 점령 작전은 미국의 개입으로 분쟁이 장기화됨으로써 통일이 지연될 것이라는 이유로 시기적으로 적절치 않음을 강조하였다또한 옹진반도 점령도 남한의 공격이 있을 경우 이들이 북한 영역으로 들어오도록 한 뒤 반격작전을 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12)

해가 바뀌어 1950년 1월17 북경 향발 이두연 북한 대사를 위한 박헌영 외상주최 오찬 시 김일성 2명의 참사관급 소련 외교관 이그나티에프(Ignatiev)와 페리센코(Pelishenko)에게 이제는 중국의 통일이 완료되었으므로 남한을 해방시킬 차례라고 언급하면서 그 동안 남한 측의 대북한 공격이 없었기 때문에 1949년 3월 5 스탈린에게서 승인을 받은 반격형태로서의 대남공격을 할 수 없었으므로 남한해방을 위한 인민군의 대남 공격 승인을 받기 위하여 스탈린을 방문할 것을 제기하였다. 김일성은 이어 “자신이 공산주의자이며 상부의 규율을 지키는 사람이며 스탈린이 그에게 법이기 때문에 [그의 승인 없이는] 공격을 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김일성의 상기 언급 내용을 청취한 소련 대사관원들이 이 문제에 대한 대화를 회피하고 일반 문제로 대화주제를 바꾸려 하자 김일성은 쉬티코프 대사에게 접근하여 1949 6월 모택동도 중국혁명이 끝나면 북한을 돕겠다고 약속한 바가 있다고 하면서 자신이 남한공격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스탈린을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어 김일성 3일 만에 끝날 수 있는 옹진작전을 스탈린이 허가해주지 않는다고 하면서 총공격 시에는 몇 일 내에 서울을 점령할 수 있다고 강조하였으나 쉬티코프는 옹진작전은 불가능하다고 답변하였다.(13)

스탈린은 상기 대화에 관한 쉬티코프의 비밀 전문을 비신스키(Andrei Vyshinsky) 외상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후 1 30일 쉬티코프 대사에게 하달한 전문에서 “김일성의 불만은 이해가 되나 그가 남한에 대하여 하고자 하는 큰 일은 많은 준비가 필요하며 위험이 없도록 잘 조직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김을 만나 동 문제를 의논할 용의가 있으며 그를 도울 의사가 있다”는 자신의 의사를 김일성에게 전달토록 지시하였다.(14)

스탈린은 자신이 선택한 시기의 한국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하여 1950 2월과 3월 중 북한 내 전쟁준비를 감독하기 시작하였다. 스탈린은 중국과 협의한 후 2 9일 군사적 방법으로 통일을 달성하겠다는 평양 측의 의도에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의사를 표명하면서 한반도에서 대규모 군사작전의 준비를 시작해도 좋다고 허락을 하였다. 그 후 소련은 북한을 향해 탱크, 탄약, 군 장비, 대포, 의약품 및 석유 등을 적극적으로 공급하기 시작하였다.(15)

2 4김일성은 북한의 추가 창설 3개 보병사단용 무기 구입을 위하여 1951년도 소련의 대북한 차관을 1950년도 중에 사용할 수 있도록 스탈린의 허가를 구해줄 것을 쉬티코프 대사에게 요청하고(16) 3 9일 추가로 1 2-5천만 루불 상당의 무기 구입을 요청하는 공한을 쉬티코프 대사를 통하여 소련 정부에 송부하였다.(17) 이에 대하여 소련 측은 3 12자 비신스키외상의 쉬티코프 대사앞 전문과 3 18일자 스탈린의 김일성 앞 메시지를 통하여 동의하였다.(18) 또한 스탈린은 2 23일 쉬티코프 대사가 겸직하고 있던 북한인민군 군사고문단장직에 전쟁영웅 바시리에프(Vasiliev)중장을 임명하였다.(19)

러시아정부가 한국정부에 제공한 소련 측 비밀문서는 김일성박헌영 1950년 3월 30 평양을 떠나 모스크바를 방문한 후 4 25일 평양으로 귀환하였음을 밝히고 있지만,(20) 상세 모스코바 체류 일정과 스탈린과의 대화 내용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스탈린과 김일성간의 대화 시 스탈린이 강조한 내용은 5김일성이 중국을 방문하여 남한 공격에 대한 스탈린의 방침을 설명하자 마오쩌둥이 이를 스탈린에게 확인하는 전문을 타전한 데 대하여 스탈린이 답변을 해주는 5 14일자 전문에 나타나 있다스탈린은 1950 4월 모스코바 회담에서 김일성에게 국제환경이 변하고 있다고 하면서 북한이 통일과업을 개시하는데 동의하되, 이 문제의 최종 결정은 중국과 북한이 함께 내려야 하며 만일 중국 측의 의견이 부정적이면 새로운 협의가 이루어 질 때까지 이 문제의 결정을 연기하자고 제의하여 북한 측과 합의하였다(21)고 하면서 김이 마오쩌둥에게 설명한 내용을 확인해주었다.

스탈린은 김일성이 끈질기게 남침 승인을 요청하였기 때문에 승인을 한 것이 아니라 1949년 수차에 걸친 김일성의 남침 승인 요청을 거부하였던 것처럼 당시 국제정세와 한국전 개전 시 소련의 손익을 면밀히 계산한 기초 위에 남침을 승인하는 결정을 내렸다. 스탈린이 1949년 기간 동안 계속 김의 남침승인 요청을 거부하고 38선에서의 무력충돌이 전면전으로 비화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쉬티코프 대사로 하여금 철저히 감독을 하도록 10월 이후 수차에 걸쳐 지시(22)하였던 것과는 달리 태도를 바꾸어 1950년 1월 30 전문에서 김일성의 남침을 승인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게 된 이유를 밝히는 자료로서는 상기 5 14일자 스탈린의 모택동 앞 전문과 “변화된 국제환경”에 대한 스탈린 자신의 설명을 수록한 보고서가 있다.

러시아대통령실 문서고에 소장되어 있는 김일성의 모스크바 방문에 관한 구 소련공산당 국제부 보고서는 “변화된 국제환경”에 대한 스탈린 자신의 설명을 기술하고 있다. 그는 1949 8월 소련의 원자탄 보유, 10월 중국공산당의 승리, 1950 1월 중 구체화되어 가고 있던 중·소 우호, 협력, 상호 원조조약(The Treaty of Friendship, Alliance, and Mutual Assistance, 이하 중·소 동맹조약으로 약칭)의 체결로 중국이 북한을 도울 수 있고 또 미국이 아시아 지역에서 공산주의에 도전하는데 더욱 주저하게 될 것이라고 김일성에게 말하였다.(23) 그러나 그는 1 12일 한국이 미국의 방위선 밖에 위치한다고 한 미국 애치슨(Dean Acheson) 국무장관의 선언에 대하여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았다. (계속)

<필자 주>

6) Newsweek, July 14, 1997, pp. 28-29.

7)  Kathryn Weathersby, Korea, 1949-50 : To Attack or not to Attack?  Stalin, Kim Il Sung, and the Prelude to War,CWIHP Bulletin, Issue5(Spring1995),p. 2; 외무부, 「한국전 문서요약: 1949.1-1953. 8(1994), p. 4.

8) 김영호(2006), p. 53.

9)  Weathersby, Korea , 1949-50 : To Attack and not to Attack? p. 2.; 외무부, 「한국전 문서요약」, pp. 10-12;  93일자 면담내용에 대한 영문번역 전문(電文) CWIHP Bullentin, Issue 5, p. 6을 참조.

10) Weathersby, Korea, 1949-50 : To Attack or not to Attack? p. 2; 외무부, 「한국전 문서요약」, pp. 12-13;  관련 영문번역 지시 전문은 CWIHP Bulletin, Issue 5, p. 6을 참조.

11) Weathersby, Korea, 1949-50 : To Attack or not to Attack?p. 3, 외무부, 「한국전 문서요약」, pp. 13-15;  914일자 영문번역 전문은 CWIHP Bulletin, Issue 5, pp. 6-7.

12) Weathersby, Korea, 1949-50 : To Attack or not to Attack? p. 3; 외무부, 「한국전 문서요약」, pp. 17;  924일자 영문번역 지시 전문은 CWIHP Bulletin, Issue 5,. pp. 7-8을 참조.

13) 쉬티코프는 117일 오찬 모임에서의 김일성 언급내용을 119일 비신스키외상 앞 전문으로 보고했는 바, 동 영문번역 전문은 CWIHP Bulletin, Issue 5, p. 8을 참조.

14) Weathersby, Korea, 1949-50 : To Attack or not to Attack? p. 3; 외무부, 「한국전 문서요약」, p. 21; 관련 영문번역 지시전문은 CWIHP Bulletin, Issue 5, p. 9를 참조.

15) 드미트리 안토노비치 볼코고노프 저, 김일환 5인 역, 「레닌에서 고르바쵸프까지, 크렘린의 수령들」, 상권(서울 : 한송, 1996), p. 342.

16) Kathryn Weathersby, New Russian Documents on the Korean War : Introduction and Translation,CWIHP Bulletin, Issues 6-7(Winter 1995/1996), p. 30; 외무부, 「한국전 문서요약」, p. 22; 관련 영문)     번역 전문(문서2) CWIHP Bulletin, Issues 6-7, p.36을 참조.

17) 관련 영문번역 전문(문서 5) CWIHP Bulletin, Issues 6-7, p. 37을 참조.

18) 관련 영문번역 전문(문서 6 8) CWIHP Bulletin, Issues 6-7, p. 37을 참조.

19) 관련 영문번역 전문(문서 4) CWIHP Bulletin, Issues 6-7. P. 37을 참조.

20) 외무부, 「한국전 문서 요약」, pp. 23-24.

21) Ibid., p. 24;관련 영문번역 전문은 CWIHP Bulletin, Issue 4(Fall 1994), pp. 60-61을 참조.

22) 1949년 10월 14 북한군이 옹진반도의 은파산에 대해 대규모 군사공격을 하자 1949년 11월 3 전문에서 그로미코(Andrei A. Gromyko)외무상은 쉬티코프가 38선 상에서의 북한 측의 어떠한 군사 활동도 하지 않도록 한 공산당 중앙위 정치국의 지침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것을 이유   로 대사의 징계문제까지 거론되고 있음을 통보하였다.

23) 예프게니 바자노프ž나딸리아 바자노바, 「소련의 자료로 본 한국전쟁의 전말」(서울 : 도서출판 열림, 1998), pp. 52-53; Sergei N. Goncharov, John W. Lewis, Xue Litai, Uncertain Partners: Stalin, Mao and the Korean War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3), p. 114.



남북관계가 천안함 사건 등으로 경색되고 있으며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 한반도 상황이 어떻게 흐를지 모르는 상황에서 주변국의 대한반도정책은 복잡해지고 있는 양상이다. 2010년은 625발발 60주년, 419혁명 50주년 등으로 다양한 이해단체들이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만, 모두 과거에 얽매여 있고, 막상 대한민국의 미래를 향한 대안제시를 하지는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이 글은 송종환 명지대 북한학과 초빙교수가 2010년 6월4 자유민주연구학회가 주최한 6.25 60주년 기념 세미나에서 발제문으로 발표한 것을 소개한다. 625를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글이 아닌가 싶다.

 

<6.25 60주년기념 특집>

 

공산권 자료로 본 6·25 전쟁 재평가(1): 러시아 측이 공개한 비밀문서를 중심으로*

 

1. 문제의 제기

지난 3 26일 백령도 인근 해역에서의 천안함 폭침 원인을 조사해 온 민군합동 조사단은 5 20일 조사결과 발표에서 침몰 해역에서 수거한 어뢰의 프로펠러와 추진축 등 부품이 북한산 CHT-02D 어뢰의 설계도면과 일치함을 밝혔다. 천안함 폭침이 북한 측 소행이라는 ‘결정적 증거(스모킹 건: smoking gun)’들이 나온 것이다.

이에 대해 북한은 ‘날조극’이며 남북한 관계를 파탄시키려는 모략이라는 반응을 보이면서 “물증을 확인하기 위한 검열단을 남한 현지에 파견하겠다“고 하고 있다. 이러한 북한의 태도는 북한이 60년 전 대남 평화공세를 취하다가 6 25일 새벽에 38도 분계선을 뚫고 남침을 하고서도 지금까지 북침을 하였다고 선전을 하고 아웅산 폭탄테러 사건, 대한항공 858기 폭파사건 등 그간 자행해온 각종 도발과 테러를 부인해 온 것보다 더 질이 나쁘고 뻔뻔하다. 마치 살인을 부인하던 범인이 현장 검증까지 스스로 하겠다는 식으로 막가는 태도이다.

1950 6 25 새벽 38선에서 기습공격을 감행한 북한군이 서울 시내에 입성하기까지 단 3일이 걸렸다. 북한군은 당일 옹진반도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26일 의정부, 27일 창동, 28일 새벽 미아리 방어선을 파죽지세로 돌파했다. 그동안 개성·김포· 문산· 포천·의정부·춘천·가평 등을 손아귀에 넣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전력에서 남북한은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다. 북한의 지상군 병력은 국군의 2배였다. 10개 보병사단과 1개 전차여단, 3개 독립연대 등 182000명이었다. 국군은 8개 보병사단과 2개 독립연대 등 94000명이었다. 북한 전투장비는 남한의 3배가 넘었다. 개전 당시 북한은 200대가 넘는 전차를 보유했다. 국군은 단 한대도 없었다. 장병들은 북한 전차 소리만 들어도 도망을 가거나 두려움에 떨었다. 공군력의 경우 북한은 전투기 포함 211대가 있었지만, 아군은 연락기와 연습기 22대가 전부였다.

북한은 38도선 전역에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해 한 달여 만에 부산을 점령한다는 계획이었다. 북한 주공(主攻) 4개 사단과 1개 전차여단으로 구성된 제1군단이 맡았다. 3·4사단과 제105전차여단 예하 2개 전차연대는 의정부-서울 방향으로, 1사단과 1개 전차연대는 문산-서울 방향으로 공격했다. 나머지 6사단은 한강을 넘어 김포-영등포로 진격하게 했다.

조공(助攻) 3개 보병사단과 1개 모터사이클연대로 구성된 제2군단이 맡았다. 이 중 제2, 12사단과 모터사이클연대는 춘천-가평·홍천-수원 방향으로 진격해 서울 동측을 우회 공격, 국군 주력을 포위하도록 했다. 나머지 제5사단은 제766유격연대와 제945육전대의 지원을 받아 동해안 축선을 따라 포항 방면으로 남진하도록 했다.

국군의 전방방어 부대는 4개 사단과 1개 연대였다. 옹진반도에 보병 제17독립연대, 개성·문산에 제1사단, 의정부 북방에 제7사단, 춘천 북방에 제6사단, 동해안에 제8사단을 배치했다. 그나마 북한 남침 전날인 24 0 기해 한동안 계속했던 비상경계령이 해제됨에 따라 많은 장병이 휴가와 외박을 나가 부대에 남아 있는 병력은 절반에 불과했다. (1)

위와 같은 전쟁 초기의 전황과 이를 맞이한 한국 측의 대응, 특히 많은 장병의 휴가와 외박에 비추어 6·25 전쟁이 어느 측의 공격에서 시작되었음이 자명한데도 한국 국내에서는 북한의 북침 주장이 위험할 정도로 퍼져 있다.

이와 같은 북침 주장과 관련하여 지난 10년간 좌파정부 집권동안 주적 개념에 대하여도 김충배 전 육군사관학교 교장이 “2004 1월 육사 가()입교생 의식조사”를 한 결과 당시 250여명의 가입교생 중 무려 34%가 주적(主敵)이 ‘미국’이라고 답했고, ‘북한’이라고 답한 입교생이 33%에 머물 정도였다고 증언한 것처럼 크게 오도된 바 있다.

이렇게 학생들의 주적 개념이 오도되고 있는 것은 이명박 정부 하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2008년 6월 23 행정안전부가 “리서치&리서치”에 의뢰해 전국 중·고생 1,01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안보·안전의식 설문조사에서 ‘우리나라 안보에 가장 위협적인 국가’를 묻는 질문에 미국(28.4%)이 가장 높았으며, 다음이 일본(27.7%)이고, 북한은 24.5% 3위에 그쳐 충격을 주고 있다.

북한은 전쟁에서 죽거나 부상을 당하거나 행방불명이 된 남북한 군인, 유엔군과 중공군의 군인이 300만 명에 달하고 또 10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죽거나 부상을 당하거나 행방불명이 된  야만적인 6·25 남침 전쟁을 일으키고도 북침 주장을 계속하고 있고 한국 내부에도 북한의 주장에 동조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북침 주장은 김일성박헌영이 전쟁을 구상하고 시작할 때부터 갖고 있던 위장전술임이 북한 자료 분석을 통하여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2)

특히 1992년부터 러시아가 더 이상의 논쟁의 여지가 없을 정도의 ‘결정적 증거’들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전쟁 전후 스탈린(Joseph Vissariovich Stalin)-김일성-마오쩌둥(毛澤東) 간에 오고 간 비밀전문들을 공개함으로써 1970년대 이후 수정주의론자들이 주장해온 북침설이나 남침유도설은 더 이상 지탱되기 어려워졌고(3) 남침, 북침에 대한 논쟁도 사실상 끝난 것처럼 보인다.

다만 남아 있는 문제는 흐루시쵸프((Nikita Khrushchev)의 회고록(4), 6·25 전쟁  당시 북한 인민군 부총참모장과 소련 주재 북한 대사를 역임한 이상조의 1989년 9월 11 기자회견 등에서 강조된 “한국전쟁이 김일성의 전쟁”인가를 검증하는 일이다.

과연 한국전쟁이 김일성의 개전의지와 역사적 결단에 의하여 일어났는가를 1992년부터 러시아 측에 의하여 공개된 세 가지 종류의 한국전쟁 관련 비밀문서들(5)로 검증해보고 휴전 57년이 되어도 끝나지 않은 전쟁에서 얻을 교훈과 대책을 제시하고자 한다.(계속)

<필자 주>

* 발표문은 『국제정치논총』 제39 2(1999)에 “한국전쟁에 대한 소련의 전략적 목표에 관한 연구” 제하로 개재된 연구자의 논문 중 누구에 의하여 남침 전쟁이 발발되었는가를 6. 25 전쟁 60주년을 맞아 다시 조명하고 그 후 발굴된 자료들로 업데이트한 것이다.

1) 최용호, “미니전사, ① 전쟁발발,” 『조선일보』, 2010. 3. 8, p. A5.

2)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II(서울: 나남, 2008), p. 871.

3) 김학준, 『한국전쟁-원인·과정·휴전·영향』(서울: 박영사, 2003), 3 개정·증보판, p. 414.

4) Khrushchev Remembers, with an Introduction, Commentary and Notes by Edward Crankshaw, translated and edited by Strobe Talbott (Boston: Little, Brown and Co., 1970).

5) On the Korean War, 1950-53, and the Armistice Negotiations 제하 첫 번째 자료는 미국과 전쟁 중인 베트콩에 대한 소련의 지원문제를 중국, 월맹 측 관계관들과 협의하려는 소련 관계관들에게 배경정보로 제공 할 목적으로 1966년 소련 외무성이 한국전쟁에의 소련과 중국의 개입 관련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Kathryn Weathersby, New Findings on the Korean War : Translation and Commentary, 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 Bulletin Issue 3 (Fall 1993), Woodrow Wilson International Center for Scholars, Washington, D. C. pp. 1,14-18. 두 번째 자료는 옐친(Boris Yeltsin) 대통령이 1994 6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영삼 대통령에게 제공키 위하여 정리한 『한국전쟁 관련 러시아 외교문서』(이하 『한국전 문서요약』로 약칭)로서 1949-53년 기간 중 한국전쟁에 관한 216, 548쪽에 이른다. 세 번째 자료의 정식 명칭은 The Archive of the President, Russian Federation 이며 호칭은 APRF로서 1950. 2- 1953. 7 기간 중의 총 1, 200쪽에 이르는 러시아 대통령실 문서고 소장 문서들이다. 상기 문서들은 1993년 가을부터 Washington, D. C. 소재 Woodrow Wilson International Center for Scholars가 발간하는 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 (이하 CWIHP로 약칭) Bulletin에 시리즈로 게재 되었으며 http://www.wilsoncenter.org/cwihp  The Korean War 섹션에서 검색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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