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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권자료 - 해당되는 글 3건


남북관계가 천안함 사건 등으로 경색되고 있으며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 한반도 상황이 어떻게 흐를지 모르는 상황에서 주변국의 대한반도정책은 복잡해지고 있는 양상이다. 2010년은 625발발 60주년, 419혁명 50주년 등으로 다양한 이해단체들이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만, 모두 과거에 얽매여 있고, 막상 대한민국의 미래를 향한 대안제시를 하지는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이 글은 송종환 명지대 북한학과 초빙교수가 2010년 6월4 자유민주연구학회가 주최한 6.25 60주년 기념 세미나에서 발제문으로 발표한 것을 소개한다. 625를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글이 아닌가 싶다.

 

<6.25 60주년기념 특집>

 

공산권 자료로 본 6·25 전쟁 재평가(6): 러시아 측이 공개한 비밀문서를 중심으로*

6. 한국전쟁 60주년의 교훈

이번 북한의 기습 어뢰공격은 60년 전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환기시켜주고 실감케 했다. 그리고 한국은 6·25 당시처럼 방심하는 사이에 또 북한의 군사적 도발을 당한 것이다.

2007 12월 제17대 대통령선거에서 ‘햇볕정책’을 심판한 대다수 국민들의 지지로 2008 2월 정권이 교체되고 북한의 어뢰공격으로 천안함이 폭침되었음이 밝혀졌는데도 북한의 ‘우리 민족끼리’ 주술에 홀려 해이해진 국민의 안보의식과 군의 기강은 쉽게 고쳐지지 않고 있다.

5 20일 미국, 영국, 호주, 스웨덴 조사단까지 포함된 민군합동조사단이 북한 소행에 대한 ‘결정적 증거’를 발표하자 외국 정부들도 놀라울 정도로 과학적·객관적이라는 평가를 하고 5 24일 이명박 대통령이 대국민담화에서 대북제재를 천명한 이후에도 한국 사회에서는 조사결과의 의혹을 제기하고 이를 선동하는 부류들이 여전히 활개를 치고 있다.

한반도는 공산군의 남침으로 개시된 전쟁으로 많은 인명과 재산상의 피해로 잿더미가 되었지만 한국은 전쟁이후 1954년 한국헌법이 ‘균등경제’에서 ‘시장경제’ 중심으로 개정되어 오늘날 한국의 경제적 발전과 전쟁 전의 유약성을 극복하는 기회가 되었다. (67)

또한 러시아 측이 공개한 문서를 통해 스탈린이 한국전쟁 개시 승인, 전쟁 진행 및 지원과 종전, 중국 참전 유도의 핵심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하여도 한반도 공산화 통일을 위한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공산 집단의 거듭된 남침전쟁 개시 요청의 책임이 가벼워지지는 않는다.

천안함을 공격한 김정일의 의식은 60년 전 김일성의 의식과 달라진 것이 없다. 한반도공산화 통일을 노리는 김정일 수령유일지배체제가 지속되는 한 북한의 핵무기, 탄도 미사일, 생·화학 무기, 장사정포, 특수부대와 잠수함() 등 비대칭 전력에 의한 선제공격과 속도전, 침투·국지도발은 계속될 것이다.

5 24일 이명박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에서 대북심리전 재개를 발표하자 북한은 즉각 “심리전 수단을 없애기 위한 조준 격파사격이 개시될 것”이라고 위협한 후 인민군과 전 예비병력, 보안기관에 전투태세 돌입을 명령하고 26, 27일 연일 개성공단 폐쇄 으름장을 놓고 있다.

한국군은 당면한 북한의 군사적 도발에 의한 일촉즉발의 비상상황에서  북한이 도발 하면 즉각 응징, 보복하는 태세로 전환하였음을 내외에 선포하고, 앞으로 주적(主敵) 개념을 분명히 하면서 국방예산을 대폭 증액, 국방력을 강화하여 북한에 대한 실질적 억지력을 증강하고 한미연합방위태세를 보다 긴밀히 해나가야 한다.

한국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미국과의 군사동맹을 긴밀히 하기 위하여 2012년4월 17 한미연합사 해체 연기를 요구하고 이를 지렛대로 하여 북한에 대한 중국의 적극 역할을 유도해야 한다. 일본, 러시아 등 인접 국가 및 유엔과 공조하는 양자 외교와 다자 차원의 외교를 강력히 전개하여 핵·미사일 등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개발과 대남 군사적 도발을 억지하는 국제공조체제를 강구하여야 한다.

1992 8월 한·중 수교이후 인적, 물적 교류·협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지만, 천안함 폭침 이후  5월 말 방한하여 이명박 대통령과 가진 양자회담과 한중일 3국 정상회담에서 보인 원자바오() 총리의 태도처럼 북한을 감싸는 중국의 입장은 쉬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은 지금과 같이 계속되는 북한의 군사도발이 동북아는 물론 세계 평화와 중국의 번영에 큰 부담이 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중국에 계속 전해야 한다. 60년 전 스탈린과 같이 중국이 자신의 이익과 전략적 목표만을 위하여 다른 나라를 이용하는 어리석음을 되풀이 하지 않도록 요구하여야 한다.

한국은 중국이 북한을 잃고 싶지 않은 ‘골목대장’이나 식탁에서 숟가락으로 달가닥 거리면서 보채는 아이를 보는 부모의 자세보다 미국과 함께 지금의 정치, 경제력에 상응한 G2 국가로서 세계 평화와 국제협력을 위해 리더십을 발휘해 줄 것을 촉구해야 한다. 한국은 중국이 ‘북·중 혈맹의 냉전적 사고’에 매달리지 말고 2008 5월 체결한 ‘전략적 협력 동반자’인 한국에 당연히 할 의미 있는 역할을 할 것을 요구하여야 한다.

항후 남북한 관계가 재개되더라도 긴장완화·평화정착과 교류·경제협력이 병행 추진 되어야 하며, 특히 민간 기업이 주체가 되는 후자는 기업 스스로의 수익과 위험 판단 하에 시장경제와 글로벌 표준에 맞도록 정상화하여야 한다. 개성공단의 한국기업인의 경영 회복 및 통행·통관·통신 확보와 금강산관광의 국고보조금지와 위험지역 고지 등이 그러한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이번 북한의 군사도발을 계기로 대한민국 국민은 다시 60년 전과 똑 같은 북한의 정체를 재인식, 안보의식을 확립하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 인권존중과 같은 핵심가치에 입각한 올바른 통일 구현을 확신하는 대북정책과 자세로 통일을 주도해 나가야 한다. 60주년이 되는 6·25 전쟁을 상기하면서 그렇게 자세를 가다듬는 것만이 이번에 희생된 46명의 넋을 위로하고 북한의 각종 도발과 전쟁을 끝내고 평화와 통일을 앞당기는 길이 될 것이다.

국가안보에는 여야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이제 대한민국이 ‘햇볕정책’을 청산하고 결집된 의지로 하나가 되어 새로운 각오와 결연한 행동을 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발표를 줄인다. (연재 끝)

 

<필자 주>

67) 박명림, “한국전쟁과 헌법의 변화,” 역사문제연구소·포츠담현대사연구센터, 『한국전쟁에 대한 11가지 시선』(서울: 역사비평사, 2010), pp. 88-118.



남북관계가 천안함 사건 등으로 경색되고 있으며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 한반도 상황이 어떻게 흐를지 모르는 상황에서 주변국의 대한반도정책은 복잡해지고 있는 양상이다. 2010년은 625발발 60주년, 419혁명 50주년 등으로 다양한 이해단체들이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만, 모두 과거에 얽매여 있고, 막상 대한민국의 미래를 향한 대안제시를 하지는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이 글은 송종환 명지대 북한학과 초빙교수가 2010년 6월4 자유민주연구학회가 주최한 6.25 60주년 기념 세미나에서 발제문으로 발표한 것을 소개한다. 625를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글이 아닌가 싶다.

 

<6.25 60주년기념 특집>

 

공산권 자료로 본 6·25 전쟁 재평가(5): 러시아 측이 공개한 비밀문서를 중심으로*

5. 한국 전쟁에 대한 스탈린의 전략적 목표

스탈린이 계획, 감독하고 김일성과 마오쩌둥이 주연과 조연을 맡은 한국전쟁을 일으킨 소련의 전략적 의도에 대하여 학자들에 따라 많은 견해들이 나누어져 있다. 또한 한국전쟁의 원인과 관련하여 ‘김일성의 전쟁,’ 소련의 공산주의 팽창 기도 및 스탈린 자신이 언급한 1949년 기간 중의 국제환경의 변화와 한반도가 미국의 방위선 밖에 있다고 발표한 에치슨 국무장관의 선언들이 제기되어 왔다.

첫째, 한국전쟁이 김일성의 개전 의지와 역사적 결단에 의하여 일어났기 때문에 ‘김일성의 전쟁’이라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은 것 같다. 한국 전쟁의 개시부터 휴전에 이르기까지의 동향을 구 소련 - 북한 - 중국 간에 있은 비밀전문들을 일자별로 분석하여 본 결과, 김일성 1949 3, 8, 9월 등 그 해의 거의 전 기간에 걸쳐 스탈린에게 남침 승인을 거듭 요청하였으나 이 기간에는 한국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김일성의 남침의사만으로 한국전쟁 원인을 설명하는 데는 한계점이 있다.

또한 그 당시 냉전질서 하의 국제관계 특히 북한 체제가 대부분의 동구 공산국가들의 체제와 같이 스탈린의 의도대로 소련의 치밀한 계획과 지원에 의하여 수립(55)되었음에 비추어 김일성이 한국전쟁 개시를 역사적으로 결정하고 주도했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다.

울람(Adam Ulam)교수가 “스탈린은 이미 남침계획을 갖고 있었다. 다만 그는 그가 승인을 하고 도움을 줄 가장 적절한 시기를 기다렸을 뿐이다. ..달리기 경주에서 경주가 출발을 위하여 구부려 기다리고 있는 선수에 의하여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심판이 출발신호를 함으로써 시작되는 것처럼 한국전쟁은 스탈린이 승인을 함으로써 시작되었다”(56)고 지적한 것은 공산진영 내 스탈린의 위치로 인해 스탈린과 김일성간의 관계가 주종관계 이었음에 비추어 매우 적절한 평가로 판단된다.

둘째,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즉각적으로 한국 구원을 위하여 파병을 한 트루먼 행정부는 한국전쟁을 동서냉전의 테두리에서 소련공산주의 팽창의 일환으로 보았고 이제까지의 전통적 견해가 되고 있다.

성신여대 김영호 교수는 한국전쟁의 원인을 스탈린의 롤백전략(rollback strategy)에서 찿는다. 이 롤백이론은 스탈린이 냉전 개시 이후 최초로 중국공산혁명 이후 공산세력 팽창에 유리하게 전개되는 전략적 상황과 북한 지도부의 무력통일론을 이용하여 자신의 세계 전략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북한군을 이용하여 미국의 봉쇄선을 대담하게 넘어서 한반도 전체를 소련의 영향권에 편입시키기 위하여 한국전쟁을 일으켰다고 주장한다. 스탈린은 이 롤백전략에 의하여 만일 미국이 만주로 침략해올 경우 중·소 동맹조약을 발동하여 미국을 광활한 황무지인 만주로 끌어들여 미국을 약화시키고 냉전대결에서 결정적 승기를 잡고자 하였다는 것이다.(57)

미 행정부는 1949 7월 주한미군 철수 후 8월 소련의 원폭 실험 성공, 10월 중국공산 정부의 수립 등 국제환경 변화에 대처하기 위하여 1950 1 NSC 68과 같은 대소

전략 을 검토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배경에서 그 동안 전략적으로 중요하지 않다고 평가 하였던 한반도에서 1950 6월 북한군의 남침이 있자 즉각적인 지원에 나섰다. 미국은 북한의 남침이 서독, 이란 등 다음 목표에 대한 공산진영 측의 공격으로 이어지는 소련의 세계적화전략의 일환으로 보았다. (58)

따라서 1949년 기간 중의 국제정세 변화는 스탈린이 한국전쟁을 일으키는 계기도 되고 미국이 공산진영의 팽창을 저지하는 차원에서 그 동안 전략적으로 경시해왔던 한국에 대하여 즉각적 지원을 제공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마샬 슐만(Marshall Shulman)은 “소련은 중국이 소련의  참전여부와 상관없이 한국전쟁 참전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에 북한에서의 지배적 위치를 잃을 것을 우려하여 김일성의 한국전쟁 개시 간청을 승인하였다”고 주장하였으며(59) 울람교수는 “스탈린이 남한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하기 위하여 한국전쟁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한국전쟁이 일어나면 마오쩌둥이 중국대륙에서 새로운 내전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여 소련의 지원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을 예견하고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소련의 후견적 지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할 목적으로 소련 측이 일으킨 전쟁”이라고 주장하였다.(60) 상기 두 학자는 스탈린이 한국전쟁을 일으킨 동기를 공산주의의 팽창에서 보다 그의 대중국 관계에서 찾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셋째, 스탈린이 에치슨 국무장관의 선언을 보고 남침을 승인하였다는 주장도 평소 스탈린의 미국관에 비추어 타당하지 않게 보인다. 스탈린은 한국전쟁 개시 시기를 고려할 때 미국이 개입할 것을 전제로 하였다. 김일성 1950 4월 모스크바 방문 시 남침 하더라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을 개진하였으나 스탈린은 한국과 미국이 정신을 차릴 시간을 주지 않아야 한다고 하면서 전쟁이 장기화되면 미군이 응당 개입할 것으로 판단하였다.(61) 미국의 군사적 개입 가능성에 대한 스탈린의 판단은 불가닌 (Bulganin) 국방상과 그로미코(Andrei A. Gromyko) 외무상이 1949 9월 한반도문제에 관한 소련공산당 정치국 결의안을 심의하기 위하여 만든 초안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62)

스탈린이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았지만 한국전쟁을 승인한 진정한 전략적목표는 그의 중국관(63)에 입각한 세계전략과 관련이 있다. 스탈린은 세계 제2차 대전 기간 중 2천만여명의 소련인민의 사상자를 내었고 전후 경제 재건을 위하여 북한이 통일을 위하여 남침을 하더라도 미국과의  대결이 예상되는 한국전쟁에 직접 개입할 수 없다는 구구한 변명을 내세워 한국전쟁 개시 시기 결정 때부터 중국을 개입시키고 북한 붕괴 상황에 이르자 북한을 포기한다는 마지막 카드를 제시하여 중국의 참전 지원을 극적으로 유도하였다.     스탈린이 중공군이 한반도의 전장에서 현대전을 연구할 것을 권고하면서 휴전협상을 장기화시켜 중국 측의 희생을 강요한 것을 보면 스탈린은 중국공산당이 그의 예상 밖으로 조기에 공산혁명을 달성하자 중국공산당 창당이후 견지해온 마오쩌둥에 대한 의구심(64)과 아시아에서의 제2티토 등장 가능성에 대한 우려에서 중국을 약화 하려는 의도로 한국전쟁을 일으켜 중국을 개입시킨 것으로 판단된다.

한국전쟁 발발 후 북경주재 영국 영사 브라이언(Brian)이 “조선전쟁은 중국이 대만을 점령하고 강대국이 되는 것을 방지하려는 특수한 목적 하에 소련에 의해 개시된 것”이 라고 지적한 것(65)은 상기와 같은 스탈린의 중국 약화 의도를 제대로 파악, 관찰한 것이다.

또한 스탈린은 한국전에 중국을 개입시킴으로써 중국과 서방과의 연계를 차단하고 중국을 확실히 소련의 영향권 하에 묶어두려는 것도 고려하였을 것이다.(66) 스탈린이 한국전쟁 개시 승인을 하면서 중국을 개입시킨 것은 1949 12월 마오쩌둥이 새로운 중·소 동맹조약을 체결하기 위하여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여러 가지 이유로 동 조약 체결에 긍정적 반응을 보이지 않던 스탈린이 1950 1월 영국과 인도가 중국을 승인하자 태도를 바꾸어 조약체결에 응한 것처럼 중국의 대서방 관계개선을 경계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한국전쟁을 일으킨 스탈린의 전략적 의도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949년 스탈린은 군사적으로 미국이 소련보다 월등 강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세계 제2차 대전 후 대미 관계가 급속히 악화되어 가고 있음에도 만주에 비해 부차적 가치 밖에 없는 한반도에서는 미국과 군사적으로 대결할 의사가 추호도 없었으며 북반부의 소비에트화만을 적극 추진하였다.

그러나 스탈린은 자신이 원하던 것과는 달리 마오쩌둥이 1949년 후반 중국 대륙을 석권, 공산혁명을 달성하자 1950년 초 그 동안 반대해왔던 북한 측의 한국전쟁 개시 요청을 승인하였다. 그는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전쟁 물자를 지원하고 다수의 군사 고문단을 보내어 철저한 전쟁 감독을 하면서도 미국과의 직접 대결을 끝까지 회피하면서 중국을 한국전쟁에 필사적으로 끌어 들였다. 스탈린은 북한이 남침할 경우 미국이 개입할 것으로 보고 한반도에서 중국과 미국을 싸우게 하여 양국을 모두 약화시키려는 세계 전략적 차원에서 한국전쟁을 일으켰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부차적으로 한국전쟁을 일으켜 중국의 대서방 관계 개선을 저지하려 하였다.

그러므로 중국공산혁명이 성취되지 않았다면 스탈린은 북한지도부가 무력남침을 주장하더라도 이를 승인하지 않았을 것이며 최소한 그 시점에서는 한국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계속)

 

<필자 주>

55) 1940년대에 스탈린의 후계자로 여겨져 왔던 쥐타노프(Zhdanov) 레닌그라드 당 위원회 제 1서기의 충직한 부하로서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하여 1945 4월 이래 연해주 군관구 군사평의회 위원, 1948- 1951년 북한주재 소련 특명전권대사를 역임하면서 소련의 한반도정책을 입안하고 실천에 옮기는 과정에 주도적 역할을 한 쉬티코프의 「일기」를 검토해보면, 소련 군정이 모든 정책결정의 주도자 및 집행자로 등장하여 북한을 지도하며 계획을 관철시켜 나가는 정치 메커니즘을 잘 보여준다. 쉬티코프를 정점으로 하는 북한주재 소련군 사령부는 정책결정 과정에서 주도적이면서도 최종적인 권력을 행사하였다. 세계 2차 대전 종료 후 북한의 정치드라마는 쉬티코프의 책상에서 기획되어 연해주 군관구와 북한주재 소련군 사령부 지도자들과의 회의에서 확립되면 모스크바의 재가를 얻은 후 북한 지도부를 독려하여 기획자의 의도에 충실한 북한인 출연자를 선발하고 기획자의 최종적 결재를 맡아 진행되는 것이었다. 소련의 군정에 대하여는 김학준, 『강대국권력정치 아래서의 한반도 분할과 소련의 군정개시: 1963~1946 1월』(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8), 북한의 역사 제1; 김학준, 『미소냉전과 소련군정 아래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946 1~1948 9월』(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8), 북한의 역사 제2권을 참조; 쉬티코프의 생애에 대하여는 Hyun-su Jeon with Gyoo Khang, The Shtykov Diaries : New Evidence on Soviet Policy in Korea, CWIHP Bulletin, Issues 6-7(Winter1995/1996), Washington, D. C.: Woodrow Wilson International Center for Scholars, pp. 69, 92-93을 참조; 쉬티코프가 추진한 한반도정책의 상세 내용에 대하여는 전현수, “「쉬띄꼬프 일기」가 말하는 북한정권의 성립과정,” 「역사비평」, 30(1995 가을), pp. 135-162를 참조.

56) Adam Ulam, Letters : Stalin, Kim and Korean War Origins, CWIHP Bulletin, Issue 4 (Fall 1994), p. 21.

57) 김영호, “한국전쟁 원인의 국제정치적 재해석 : 스탈린의 롤백이론,” 「한국정치학회보」, 31집 제3(1997 가을), p. 192; 스탈린의 롤백전략에 대한 김영호 교수의 상세 설명은 김영호, 『한국전쟁의 기원과 전개과정』(서울: 성신여자대학교 출판부, 2006)을 참조.

 

58) Weathersby, Soviet Aims in Korea and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1945-1950, pp. 6-7. NSC 68의 배경과 상세 내용에 대하여는 최광녕, “한국전쟁의 원인,하영선 편 『한국전쟁의 새로운 접근 : 전통주의와 수정주의를 넘어서』(서울 : 나남, 1990), pp.276-295를 참조.

59) Marshall Shulman, Stalins Foreign Policy Reappraised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1963), p. 141.

60) Adam Ulam, The Communists : The Story of Power and Lost Illusions: 1948-1991 (New York and Toronto: Charles Scribners Sons, 1992), pp. 81-82.

61)  예프게니 바자노프ž나딸리아 바자노바,「소련의 자료로 본 한국전쟁의 전말」, pp. 53-54.

62)  Ibid., p. 43.

63) 스탈린은 1926년부터 중국국민당을 혁명주력세력으로 평가하면서 마오쩌둥의 중국공산혁명을 오히려 방해하고 분단까지 기도하였으며 1945 2월 이후 세계 제2차 대전 종전 협의 과정에 대련, 여순, 동청철도와 남만철도 등 만주에 대한 특수지위를 확보하였다. 상세 설명은 송종환(1999), pp.193- 198을 참조.

64) 모택동은 1956년 3월 31 중국 주재 유딘 대사와의 면담 시 스탈린이 중국공산당 창당이후 국민당 정부를 지지하면서 중국공산혁명을 방해한 행위를 각종 사례를 들어가면서 비난하였다. 유딘 대사의 본부 보고 전문의 영문역은 CWIHP Bulletin, Issues 6-7, pp. 164-167을 참조.

65) 예프게니 바자노프ž나딸리아 바자노바,「소련의 자료로 본 한국전쟁의 전말」, p. 107.

66) Goncharov et al., Uncertain Partners: Stalin, Mao and the Korean War, p.139,143; Weathersby,Soviet Aims in Korea and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1945-1950p. 36.



남북관계가 천안함 사건 등으로 경색되고 있으며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 한반도 상황이 어떻게 흐를지 모르는 상황에서 주변국의 대한반도정책은 복잡해지고 있는 양상이다. 2010년은 625발발 60주년, 419혁명 50주년 등으로 다양한 이해단체들이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만, 모두 과거에 얽매여 있고, 막상 대한민국의 미래를 향한 대안제시를 하지는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이 글은 송종환 명지대 북한학과 초빙교수가 2010년 6월4 자유민주연구학회가 주최한 6.25 60주년 기념 세미나에서 발제문으로 발표한 것을 소개한다. 625를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글이 아닌가 싶다.

 

<6.25 60주년기념 특집>

 

공산권 자료로 본 6·25 전쟁 재평가(4): 러시아 측이 공개한 비밀문서를 중심으로*

 

4. 스탈린, 전쟁과 휴전협상의 장기화 유도

1950 9 15 유엔군이 인천상륙 작전을 한 후 9 28일 한국군과 함께 서울을 수복, 북한의 패색이 짙어지자 스탈린은 9 30일 소련공산당 정치국회의를 소집, 협의를 한 후 외무성으로 하여금 유엔에 제출할 소련 측 정전결의안을 초안하도록 지시하고 10 1일 즉각 정전, 외국군 철수 및 국제 감시 하 총선 등 요지의 초안을 마오쩌둥과 협의 후 유엔주재 소련대표부로 타전하였다.(42)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 후 승기를 잡은 상황에서 미국과 영국이 주도하는 유엔총회 정치위원회는 10 4일 상기 소련 측 결의안을 부결시켰으며 이어 유엔총회는 찬성 47, 반대 5, 기권 7표로 북한 패배 후 유엔주관으로 한반도에서의 통일 자주 민주국가 수립을 위한 선거 실시 등 요지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동 결의안 표결이 있는 날 워커(Walton Walker)장군의 제1기병부대의 선두는 38선을 돌파하였다.(43)

그러나 10 19일 밤 중국군이 압록강을 도강하여 공격에 나서자 유엔군과 한국군은 다시 후퇴, 전황이 어렵게 된 상황에서 12월 유엔주재 인도, 영국, 스웨덴 대표와 리(Trygve Lie) 사무총장은 중국 대표에게 중국이 수락할 정전조건 제시를 요청하였다이에 대하여 주우언라이는 12 7일 한반도에서의 모든 외국군 철수, 대만 및 대만 해협으로부터의 미군 철수, 한국문제는 한국인 스스로 해결, 중국정부 대표의 유엔 참여 및 대만정부 대표 축출, 일본과의 평화조약준비를 위한 4강국 외상회의 개최 등의 정전 조건을 스탈린에게 제시하면서 그의 의견을 문의하였다.(44)

같은 날 스탈린은 소련 공산당 정치국의 유엔주재 비신스키대사앞 훈령에서  미국이 패퇴를 거듭함에 따라  완패를 모면하고 시간을 벌기 위하여 한반도에서의 군사 활동 중지에 관한 제의를 빈번히 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주은래가 제시한 정전조건들은 적절치 않다고 답변하였다.(45)  스탈린은 같은 날 주우언라이에게 보낸 전문에서도 서울이 아직 해방되지 않은 시점이므로 중국 측이 모든 카드를 제시할 때가 아니라고 하면서 주우언라이가 미국과 유엔이 먼저 정전조건을 제시토록 하는 전략을 택할 것을 제시하였다.(46)  유엔 측이 다시 1951년 1월 11 정전 제안을 해왔을 때 주우언라이는 스탈린에게 문의, 그의 권고에 따라 유엔 측 제안을 거부하였다.(47)

1951 6 5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보내는 전문에서 한반도에서 장기전은 중국군이 전장에서 현대전을 연구할 기회를 갖게 될 뿐만 아니라 트루먼(Harry S. Truman) 정부를 흔들고 미·영국군의 국제적 위신을 실추시킬 수 있기 때문에 한국전쟁의 속도를 빠르게 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48) 이 당시 마오쩌둥은 국제관계에서의 중국의 위치를 높이고 중국내 혁명분위기를 고양시키기 위하여 미국으로부터 수락할 만한 조건을 확보할 때까지 전쟁을 계속할 의향을 가지고 있었지만(49) 전쟁 종료 시까지 입을 수많은 사상자 때문에 상기 스탈린의 장기전 요구에 대하여 적극적이지는 않았을 것으로 상상된다.

그러나 1951 4월과 5월 중공군과 북한군의 대공세 실패는 스탈린으로 하여금 유엔군 사령부와의 휴전협상을 개시토록 압박하였다. 1951년 6월 5 말리크(Jacob Malik) 주유엔 소련대사는 평화를 원하며 가급적 빠른 시일 내 한국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원한다고 하면서 미국정부가 이 문제에 관하여 북한과 중국 측과 접촉해 줄 것을 케난(George F. Kennan)에게 통보하였다.(50)  몇 일 후 김일성과 가오강(高崗, 만주에 위치하고 있던  중국의 친소인사로서 1955년 숙청됨.)은 동 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스탈린을 방문하였다

마오쩌둥이 6, 7 2개월간은 중공군과 북한군이 수세적 위치에 있으므로 유엔군사령부와 협상을 개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제시해옴에 따라 스탈린은 협상개시를 위하여 필요한 조치를 취하도록 말리크대사에게 지시하였다.(51) 1951 7월부터 1953 7월까지 계속된 휴전협상의 초기단계에 마오쩌둥은  중국 측이 만족할 조건들을 확보할 경우 휴전협정을 체결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52) 그러나 스탈린은 미국이 휴전협정을 체결해야 할 더 급박한 필요가 있다고 하면서 중국과 북한 측은 서두르거나 협상의 조기 종결의사를 보이지 않고 계속 강경입장을 견지토록 종용하였다.(53)

교착상태에 있었던 휴전협상은 1953 3월 스탈린 사망 후 급진전을 보게 된다스탈린 사후 2주 후 3 19일 소련 각료회의는 한국전쟁을 조기 종결토록 결정을 하였는바, 동 결정은 스탈린이 한국전쟁 계속의 주요인이었으며 그가 죽은 뒤 곧 소련, 중국, 북한이 휴정협정체결을 위한 조치들을 취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54) (계속)

<필자 주>

42) Mansourov, Stalin, Mao, Kim, and Chinas Decision to Enter the Korean War, September 16-October15, 1950,pp. 98-99.

43) Ibid., p. 101.

44) Weathersby, New Russian Documents on the Korean War, p. 32; 외무부,「한국전 문서요약」,   p. 60; 관련 영문번역 전문(문서 47) CWIHP Bulletin Issues 6-7, p. 52를 참조.

45) Weathersby, New Russian Documents on the Korean War, p. 32; 외무부,「한국전 문서요약」, pp. 60-61; 관련 영문번역 전문(문서 48) CWIHP Bulletin Issues 6-7, pp. 52를 참조.

46) Weathersby, New Russian Documents on the Korean War, p. 34; 관련 영문번역 전문 (문서 49) CWIHP Bulletin Issues 6-7, pp. 52-53을 참조.

47) Weathersby, New Russian Documents on the Korean War, p. 34; 관련 영문번역 전문 (문서 52) CWIHP Bulletin Issues 6-7, pp. 54-55를 참조.

48) Weathersby, New Russian Documents on the Korean War, p.34; 관련 영문 번역전문 (문서65) CWIHP Bulletin, Issues 6-7, p. 59를 참조.

49) Chen Jian은 모택동이 한국전쟁 시 북한을 지원한 동기는 유엔군의 중국 국경 접근에 따른 안보 위협보다 국제적으로 신생 중국의 위신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Jian, Chinas Road to the Korean War, pp. 211-223. 

50) Kennan to Matthews, 5 June 1951, in U. S. Department of State, FRUS, 1951, Vol. VII(pt.1), pp. 507-511.

51) Weathersby, New Russian Documents on the Korean War, p. 35, 말리크 대사는 6 23일 유엔 라디오 망을 통한 연설로 휴전 협상을 제의하였다.

52) Weathersby, New Russian Documents on the Korean War, p. 35; 관련 영문번역 전문(문서 84~88) CWIHP Bulletin, Issues 6-7, pp. 66-69를 참조.

53) Weathersby, New Russian Documents on the Korean War, p. 35; 관련 영문번역 전문(문서 95) CWIHP Bulletin, Issues 6-7, pp. 72를 참조.

54)Weathersby, New Russian Documents on the Korean War, pp. 34~35; 관련 영문번역 전문(문서 112) CWIHP Bulletin, Issues 6-7, pp. 80-83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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