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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정원 - 해당되는 글 207건


2010년 개정판의 객관식 문제에 대한 수험생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정리하였습니다. 오답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질문을 보내준 수험생에게 감사 드리며, 앞으로도 지속적인 관심을 부탁 드립니다. 공부를 하다가 궁금한 사항이 있는 수험생은 주저 말고 이메일(stmin@hotmail.com)으로 언제던지 질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2010년 개정판 객관식문제 해설

안녕하세요. 공부 중 의문이 있어 질문 드립니다.

1. 국가정보학 319p 19국정원 직원 분류문제

    국정원법에 원장/차장-정무직, 기조실장-별정직. 직원법에 직원은 1급 내지 9급과 기능직으로 구분한다. & 계약직을 둘 수 있다.   그래서 3.

     그런데일반적으로 공무원을 분류할 때 경력직(일반직, 특정직, 기능직)과 특수경력직(정무직, 별정직, 계약직, 고용직)으로 나누고, 특정직 공무원은 법관, 검사, 외무공무원, 경찰공무원소방공무원, 교육공무원, 군인, 군무원 및 국가정보원의 직원과 특수분야의 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위 직원법 2조에서 발하는 1~9급이 특정직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결국 포함되지 않는 분류는 고용직이나 일반직이 아닌가 하는데... 맞는 건지요.

 à 맞습니다. 국정원의 직원은 특정직 공무원입니다.

 

2. 국가정보학 321p 26번에 3 "사이버 위협수준별 경보를 3단계에 걸쳐 발령한다 "

     국정원 홈페이지의 국가사이버안전센터에 들어가보면 경보단계를 4단계로 하던데 어떻게 다른 건가요?

à 관심, 주의, 경계, 심각 등 4단계로 구분하여 발령하는 것이 맞습니다.

 기타한국정보보호진흥원은 '09.7.23. 한국인터넷진흥원으로 통합되었다고 합니다.

        국정원 원훈은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으로 변경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à . 모든 내용을 최신으로 업데이트 하지 못했습니다.

 

위 내용은 2011년 개정판에 반영할 예정입니다. 이점 양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출처:국가정보략연구소]



2010년 개정판의 객관식 문제에 대한 수험생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정리하였습니다. 오답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질문을 보내준 수험생에게 감사 드리며, 앞으로도 지속적인 관심을 부탁 드립니다. 공부를 하다가 궁금한 사항이 있는 수험생은 주저 말고 이메일(stmin@hotmail.com)으로 언제던지 질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2010년 개정판 객관식문제 해설

질문1. 북한이 전문적으로 해커를 양성하는 대학은 정확히 어디어디인가요?

책에서 283p 287P에 있는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하면, 미림대학, 모란대학, 압록강대학, 무림대학, 금성학원이 맞나요? 정확하게 정리 부탁 드립니다.^^

à 북한에 무림대학이라는 대학은 없습니다.

 

질문2. 334p 14번 문제에서 현재 북한 노동당 소속 정보기관이 아닌 것은 어느 것인가?

1. 통일전선부 2. 대외연락부 3. 35호실 4. 작전부

 

이렇게 나와있는데요. 323p의 북한 정보기관 배치도를 보면

- : 통일전선부 ,대외연락부

- 정찰총국 : 정찰국, 작전부, 35호실로 되어있습니다.

작전부가 정찰총국으로 분류되어서 당 소속이 아닌 것은 맞는데 그럼 35호실도 답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요?

책 앞뒤를 살펴봐도 확실하게 이해가 가지 않아 질문 드립니다.^^

그리고 현재 북한 관련한 사항들이 계속 바뀌고 있는 것 같은데 관련 사항들 블로그에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à 2009 4월에 북한 노동당 소속 작전부와 35호실이 인민무력부 정찰국으로 소속이 변경되었습니다. 지적하신 대로 북한의 정보기관의 소속이 계속 변하고 있습니다. 관련 내용을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해서 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위 내용은 2011년 개정판에 반영할 예정입니다. 이점 양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출처:국가정보략연구소]



2010년 개정판의 객관식 문제에 대한 수험생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정리하였습니다. 오답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질문을 보내준 수험생에게 감사 드리며, 앞으로도 지속적인 관심을 부탁 드립니다. 공부를 하다가 궁금한 사항이 있는 수험생은 주저 말고 이메일(stmin@hotmail.com)으로 언제던지 질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2010년 개정판 객관식문제 해설

질문1. p. 252 4 1) 해킹 ..선의의 의도..

크래킹은 다른 사랑의 컴퓨터시스템에 무단으로 침입하고 정보를 훔치거나 프로그램을 훼손하는 등의 불법행위 p.253 5) 스파이웨어 ..침입하여 개인정보..빼내고..

스니핑 ..도청 또는 절취... 스푸핑 ..단순히 악용하고자 하는 호스트의 개인주소를 변경시켜 이를 통해 해킹(선의의 의도 아닌가요?)

설명이 잘 이해(구별)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를 보면 해킹일 때도 스파이웨어, 스니핑, 스푸핑..일때도 있습니다 도청, 엿듣기가 들어가면 스니핑인 것 같은데 아닌 경우도 있고...

p.263 16 ..타인의 정보 수집하여... 개인정보로 악용하는 범죄

①크래킹 ②해킹 ③스니핑 답③

p.264 22 ..타인의 컴퓨터나 중요전산자원을 무단으로 침입하여 손해를 끼치는 행위 답②

②해킹 ③스니핑 ④스파이웨이

p.265 24 ..내부에 침입하여 개인정보를 빼내는..④스니핑

 

p.264 27 ..상대방의 통신내용을 엿듣고 개인정보 등을 입수하여 타인의 정보를 악용하여 2차적 범죄행위로 이어지는 범죄행위

③스니핑

--> 해킹과 크래킹은 불법적으로 컴퓨터 시스템자원에 침입하는 불법행위로 보면 됩니다. 253페이지 본문의 내용을 다시 한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질문2. p.417 7번 답①인가요? ③독일은 법치국가답게 정보기관 설립에 관한 법률을 제정한후 모든 정보기관을 창설.. 해설부분은 BND 1956년 창설.. 법률적 근거..1990제정

--> 정답은 3번입니다.

 

질문3. p.422, p.430 10번 술라 코헨 경동 마타하리가 나오는데 다른 문제에서는 보기가 슐라 코헨과 슐라미트 코헨 둘 다 나와서 동일인인데 문제가 잘못된 건지 궁금합니다

--> 슐라 코헨이 맞습니다.

 

질문4. p287 23번 북한이 정보전대비하기 위해 해커를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미림대, 압록강대, 금성학원

p.272 4 4)국가기관 ②북한도 무림대학에서 해커를 양성하고 김정일해커부대가 있는 것으로... p.281 북한의 해커양성기관 모란대학은 해커를 양성한다

군은 압록강대, 미림대학, 자동화대학, 미림대, 무림대, 모란대, 김일성군사대학 모두 다른 것인가요? 같은데 오타인가요 또 아니면 같은 것을 이름만 조금씩 다르게 부르기도 하는 건가요?

à 무림대는 없고, 미림대가 김일성 군사대학으로 불립니다. 모란대도 있습니다.

 

질문5 다른 곳에서 본 문제입니다만 책에서 확인을 못하던 문제인 것 같아 질문합니다

산업정보를 취득하는 방법 중 나머지와 다른 하나는?

①위장획득공작, ②제3국으로의 우회, ③최종사용자의 변경, ④수색공작

à 1, 2, 3번은 간접적이고, 4번은 직접적이라 다르다고 보는 것 같군요.

 

질문 6. 출처를 숨기기 어려워 기만정보를 제공하기 어렵다는 한계를 지닌 비밀공작?

①선전공작 ②정치공작 ③영향공작 ④경제공작

책에서 풀 때는 폭력성이 높은 준군사공작이고 선전공작은 기만정보제공이 쉽고 폭력성이 낮은 것이 아닌가요? 이렇게 본 것 같은데..

à 이 문제는 질문이 부적절해 보입니다.

 

질문7 답변 글 중에

2010년 개정판 25장 정보기관의 통제와 균형에 관한 내용

질문 1. 미국 상/하원 정보위원회 임기?

상원 8년인데 하원이 교재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어서요 상원, 하원 정확히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습니다.

à 상원은 8년이고 하원은 6년입니다.

 

질문 8. 우리나라 정보위원회 임기?

민진규교수님 책에 4년이라고 나와있던데 제가 정보위원회 홈페이지에서 2년이라고 적힌걸 봐서 어떻게 맞는 건지 모르겠네요..

à 2008년 8월 25 국회법이 개정되면서 다른 상임위원회와 차이가 없어졌습니다. 홈페이지를 수정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질문 9. 민진규 국가정보학 2010년판 p463 미국 (3)②‘상원은 8, 하원은 6년’이라는 책 부분이 잘못되었다는 말인가요? ->상원은 6, 하원은 2년으로 고쳐야 하는지..

민진규 국가정보학 2010년판 p466 한국 3.(1)③‘과거 위임의 임기는 4년으로..하였으나 ..다른 상임위원회의 임기가 2년인 것과 마찬가지고..’라 적혀있는데 위에는 책에 4년이라고 썼네요.. 과거에 4년이었지만 지금은 다른 상임위원회 차이 없이 모두 2년인 것이 맞나요?

à 미국 정보위원회 임기는 상원은 8, 하원은 6년이 맞습니다. 과거에는 4년이었지만, 2008년 법률 개정으로 모두 2년이 되었습니다.

 

위 내용은 2010년 개정판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점 양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출처:국가정보략연구소]


[국가정보학 이론 특강]



 

[국가정보학 문제풀이 특강]



국가정보학을 공부하는 수험생들로부터 오는 질문 중 다른 수험생에게도 도움이 될만한 내용을 정리하여 공유하고자 합니다. 공부를 하다가 궁금한 사항이 있는 수험생은 주저 말고 이메일(stmin@hotmail.com)으로 언제든지 질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위성의 차이점에 관한 내용

수고하십니다~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다분광/고분광 위성 차이를 아주 아주 간단히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à 저도 위성사진의 전문가가 아니어서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위성사진관련 전문서적에 있는 내용을 정리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먼저 다분광위성은 어느 일정 범위의 파장구역을 수 nm 혹은 수십 nm이내로 아주 작게 나누어서 영상을 획득하는 방식의 센서가 탑재된 위성입니다. 그리고 고분광위성은 해상도가 최소 5m이내의 고해상도 사진을 얻을 수 있는 센서가 탑재된 위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분광이라는 말의 의미는 전자기파를 구분하는 단계를 말합니다. band수가 많을 수록 해상도가 높아집니다. 따라서 저분광은 10m이상인 경우는 해상도를, 중분광은 5~10m, 고분광은 5m미만 해상도를 가집니다.

 

위 내용은 2011민진규 국가정보학에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점 양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출처:국가정보략연구소]


▣  [외부칼럼] 공산권자료로 본 625전쟁 재평가(5) - 국가정보학 - 2010. 7. 22. 16:06

남북관계가 천안함 사건 등으로 경색되고 있으며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 한반도 상황이 어떻게 흐를지 모르는 상황에서 주변국의 대한반도정책은 복잡해지고 있는 양상이다. 2010년은 625발발 60주년, 419혁명 50주년 등으로 다양한 이해단체들이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만, 모두 과거에 얽매여 있고, 막상 대한민국의 미래를 향한 대안제시를 하지는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이 글은 송종환 명지대 북한학과 초빙교수가 2010년 6월4 자유민주연구학회가 주최한 6.25 60주년 기념 세미나에서 발제문으로 발표한 것을 소개한다. 625를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글이 아닌가 싶다.

 

<6.25 60주년기념 특집>

 

공산권 자료로 본 6·25 전쟁 재평가(5): 러시아 측이 공개한 비밀문서를 중심으로*

5. 한국 전쟁에 대한 스탈린의 전략적 목표

스탈린이 계획, 감독하고 김일성과 마오쩌둥이 주연과 조연을 맡은 한국전쟁을 일으킨 소련의 전략적 의도에 대하여 학자들에 따라 많은 견해들이 나누어져 있다. 또한 한국전쟁의 원인과 관련하여 ‘김일성의 전쟁,’ 소련의 공산주의 팽창 기도 및 스탈린 자신이 언급한 1949년 기간 중의 국제환경의 변화와 한반도가 미국의 방위선 밖에 있다고 발표한 에치슨 국무장관의 선언들이 제기되어 왔다.

첫째, 한국전쟁이 김일성의 개전 의지와 역사적 결단에 의하여 일어났기 때문에 ‘김일성의 전쟁’이라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은 것 같다. 한국 전쟁의 개시부터 휴전에 이르기까지의 동향을 구 소련 - 북한 - 중국 간에 있은 비밀전문들을 일자별로 분석하여 본 결과, 김일성 1949 3, 8, 9월 등 그 해의 거의 전 기간에 걸쳐 스탈린에게 남침 승인을 거듭 요청하였으나 이 기간에는 한국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김일성의 남침의사만으로 한국전쟁 원인을 설명하는 데는 한계점이 있다.

또한 그 당시 냉전질서 하의 국제관계 특히 북한 체제가 대부분의 동구 공산국가들의 체제와 같이 스탈린의 의도대로 소련의 치밀한 계획과 지원에 의하여 수립(55)되었음에 비추어 김일성이 한국전쟁 개시를 역사적으로 결정하고 주도했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다.

울람(Adam Ulam)교수가 “스탈린은 이미 남침계획을 갖고 있었다. 다만 그는 그가 승인을 하고 도움을 줄 가장 적절한 시기를 기다렸을 뿐이다. ..달리기 경주에서 경주가 출발을 위하여 구부려 기다리고 있는 선수에 의하여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심판이 출발신호를 함으로써 시작되는 것처럼 한국전쟁은 스탈린이 승인을 함으로써 시작되었다”(56)고 지적한 것은 공산진영 내 스탈린의 위치로 인해 스탈린과 김일성간의 관계가 주종관계 이었음에 비추어 매우 적절한 평가로 판단된다.

둘째,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즉각적으로 한국 구원을 위하여 파병을 한 트루먼 행정부는 한국전쟁을 동서냉전의 테두리에서 소련공산주의 팽창의 일환으로 보았고 이제까지의 전통적 견해가 되고 있다.

성신여대 김영호 교수는 한국전쟁의 원인을 스탈린의 롤백전략(rollback strategy)에서 찿는다. 이 롤백이론은 스탈린이 냉전 개시 이후 최초로 중국공산혁명 이후 공산세력 팽창에 유리하게 전개되는 전략적 상황과 북한 지도부의 무력통일론을 이용하여 자신의 세계 전략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북한군을 이용하여 미국의 봉쇄선을 대담하게 넘어서 한반도 전체를 소련의 영향권에 편입시키기 위하여 한국전쟁을 일으켰다고 주장한다. 스탈린은 이 롤백전략에 의하여 만일 미국이 만주로 침략해올 경우 중·소 동맹조약을 발동하여 미국을 광활한 황무지인 만주로 끌어들여 미국을 약화시키고 냉전대결에서 결정적 승기를 잡고자 하였다는 것이다.(57)

미 행정부는 1949 7월 주한미군 철수 후 8월 소련의 원폭 실험 성공, 10월 중국공산 정부의 수립 등 국제환경 변화에 대처하기 위하여 1950 1 NSC 68과 같은 대소

전략 을 검토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배경에서 그 동안 전략적으로 중요하지 않다고 평가 하였던 한반도에서 1950 6월 북한군의 남침이 있자 즉각적인 지원에 나섰다. 미국은 북한의 남침이 서독, 이란 등 다음 목표에 대한 공산진영 측의 공격으로 이어지는 소련의 세계적화전략의 일환으로 보았다. (58)

따라서 1949년 기간 중의 국제정세 변화는 스탈린이 한국전쟁을 일으키는 계기도 되고 미국이 공산진영의 팽창을 저지하는 차원에서 그 동안 전략적으로 경시해왔던 한국에 대하여 즉각적 지원을 제공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마샬 슐만(Marshall Shulman)은 “소련은 중국이 소련의  참전여부와 상관없이 한국전쟁 참전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에 북한에서의 지배적 위치를 잃을 것을 우려하여 김일성의 한국전쟁 개시 간청을 승인하였다”고 주장하였으며(59) 울람교수는 “스탈린이 남한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하기 위하여 한국전쟁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한국전쟁이 일어나면 마오쩌둥이 중국대륙에서 새로운 내전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여 소련의 지원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을 예견하고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소련의 후견적 지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할 목적으로 소련 측이 일으킨 전쟁”이라고 주장하였다.(60) 상기 두 학자는 스탈린이 한국전쟁을 일으킨 동기를 공산주의의 팽창에서 보다 그의 대중국 관계에서 찾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셋째, 스탈린이 에치슨 국무장관의 선언을 보고 남침을 승인하였다는 주장도 평소 스탈린의 미국관에 비추어 타당하지 않게 보인다. 스탈린은 한국전쟁 개시 시기를 고려할 때 미국이 개입할 것을 전제로 하였다. 김일성 1950 4월 모스크바 방문 시 남침 하더라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을 개진하였으나 스탈린은 한국과 미국이 정신을 차릴 시간을 주지 않아야 한다고 하면서 전쟁이 장기화되면 미군이 응당 개입할 것으로 판단하였다.(61) 미국의 군사적 개입 가능성에 대한 스탈린의 판단은 불가닌 (Bulganin) 국방상과 그로미코(Andrei A. Gromyko) 외무상이 1949 9월 한반도문제에 관한 소련공산당 정치국 결의안을 심의하기 위하여 만든 초안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62)

스탈린이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았지만 한국전쟁을 승인한 진정한 전략적목표는 그의 중국관(63)에 입각한 세계전략과 관련이 있다. 스탈린은 세계 제2차 대전 기간 중 2천만여명의 소련인민의 사상자를 내었고 전후 경제 재건을 위하여 북한이 통일을 위하여 남침을 하더라도 미국과의  대결이 예상되는 한국전쟁에 직접 개입할 수 없다는 구구한 변명을 내세워 한국전쟁 개시 시기 결정 때부터 중국을 개입시키고 북한 붕괴 상황에 이르자 북한을 포기한다는 마지막 카드를 제시하여 중국의 참전 지원을 극적으로 유도하였다.     스탈린이 중공군이 한반도의 전장에서 현대전을 연구할 것을 권고하면서 휴전협상을 장기화시켜 중국 측의 희생을 강요한 것을 보면 스탈린은 중국공산당이 그의 예상 밖으로 조기에 공산혁명을 달성하자 중국공산당 창당이후 견지해온 마오쩌둥에 대한 의구심(64)과 아시아에서의 제2티토 등장 가능성에 대한 우려에서 중국을 약화 하려는 의도로 한국전쟁을 일으켜 중국을 개입시킨 것으로 판단된다.

한국전쟁 발발 후 북경주재 영국 영사 브라이언(Brian)이 “조선전쟁은 중국이 대만을 점령하고 강대국이 되는 것을 방지하려는 특수한 목적 하에 소련에 의해 개시된 것”이 라고 지적한 것(65)은 상기와 같은 스탈린의 중국 약화 의도를 제대로 파악, 관찰한 것이다.

또한 스탈린은 한국전에 중국을 개입시킴으로써 중국과 서방과의 연계를 차단하고 중국을 확실히 소련의 영향권 하에 묶어두려는 것도 고려하였을 것이다.(66) 스탈린이 한국전쟁 개시 승인을 하면서 중국을 개입시킨 것은 1949 12월 마오쩌둥이 새로운 중·소 동맹조약을 체결하기 위하여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여러 가지 이유로 동 조약 체결에 긍정적 반응을 보이지 않던 스탈린이 1950 1월 영국과 인도가 중국을 승인하자 태도를 바꾸어 조약체결에 응한 것처럼 중국의 대서방 관계개선을 경계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한국전쟁을 일으킨 스탈린의 전략적 의도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949년 스탈린은 군사적으로 미국이 소련보다 월등 강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세계 제2차 대전 후 대미 관계가 급속히 악화되어 가고 있음에도 만주에 비해 부차적 가치 밖에 없는 한반도에서는 미국과 군사적으로 대결할 의사가 추호도 없었으며 북반부의 소비에트화만을 적극 추진하였다.

그러나 스탈린은 자신이 원하던 것과는 달리 마오쩌둥이 1949년 후반 중국 대륙을 석권, 공산혁명을 달성하자 1950년 초 그 동안 반대해왔던 북한 측의 한국전쟁 개시 요청을 승인하였다. 그는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전쟁 물자를 지원하고 다수의 군사 고문단을 보내어 철저한 전쟁 감독을 하면서도 미국과의 직접 대결을 끝까지 회피하면서 중국을 한국전쟁에 필사적으로 끌어 들였다. 스탈린은 북한이 남침할 경우 미국이 개입할 것으로 보고 한반도에서 중국과 미국을 싸우게 하여 양국을 모두 약화시키려는 세계 전략적 차원에서 한국전쟁을 일으켰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부차적으로 한국전쟁을 일으켜 중국의 대서방 관계 개선을 저지하려 하였다.

그러므로 중국공산혁명이 성취되지 않았다면 스탈린은 북한지도부가 무력남침을 주장하더라도 이를 승인하지 않았을 것이며 최소한 그 시점에서는 한국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계속)

 

<필자 주>

55) 1940년대에 스탈린의 후계자로 여겨져 왔던 쥐타노프(Zhdanov) 레닌그라드 당 위원회 제 1서기의 충직한 부하로서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하여 1945 4월 이래 연해주 군관구 군사평의회 위원, 1948- 1951년 북한주재 소련 특명전권대사를 역임하면서 소련의 한반도정책을 입안하고 실천에 옮기는 과정에 주도적 역할을 한 쉬티코프의 「일기」를 검토해보면, 소련 군정이 모든 정책결정의 주도자 및 집행자로 등장하여 북한을 지도하며 계획을 관철시켜 나가는 정치 메커니즘을 잘 보여준다. 쉬티코프를 정점으로 하는 북한주재 소련군 사령부는 정책결정 과정에서 주도적이면서도 최종적인 권력을 행사하였다. 세계 2차 대전 종료 후 북한의 정치드라마는 쉬티코프의 책상에서 기획되어 연해주 군관구와 북한주재 소련군 사령부 지도자들과의 회의에서 확립되면 모스크바의 재가를 얻은 후 북한 지도부를 독려하여 기획자의 의도에 충실한 북한인 출연자를 선발하고 기획자의 최종적 결재를 맡아 진행되는 것이었다. 소련의 군정에 대하여는 김학준, 『강대국권력정치 아래서의 한반도 분할과 소련의 군정개시: 1963~1946 1월』(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8), 북한의 역사 제1; 김학준, 『미소냉전과 소련군정 아래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946 1~1948 9월』(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8), 북한의 역사 제2권을 참조; 쉬티코프의 생애에 대하여는 Hyun-su Jeon with Gyoo Khang, The Shtykov Diaries : New Evidence on Soviet Policy in Korea, CWIHP Bulletin, Issues 6-7(Winter1995/1996), Washington, D. C.: Woodrow Wilson International Center for Scholars, pp. 69, 92-93을 참조; 쉬티코프가 추진한 한반도정책의 상세 내용에 대하여는 전현수, “「쉬띄꼬프 일기」가 말하는 북한정권의 성립과정,” 「역사비평」, 30(1995 가을), pp. 135-162를 참조.

56) Adam Ulam, Letters : Stalin, Kim and Korean War Origins, CWIHP Bulletin, Issue 4 (Fall 1994), p. 21.

57) 김영호, “한국전쟁 원인의 국제정치적 재해석 : 스탈린의 롤백이론,” 「한국정치학회보」, 31집 제3(1997 가을), p. 192; 스탈린의 롤백전략에 대한 김영호 교수의 상세 설명은 김영호, 『한국전쟁의 기원과 전개과정』(서울: 성신여자대학교 출판부, 2006)을 참조.

 

58) Weathersby, Soviet Aims in Korea and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1945-1950, pp. 6-7. NSC 68의 배경과 상세 내용에 대하여는 최광녕, “한국전쟁의 원인,하영선 편 『한국전쟁의 새로운 접근 : 전통주의와 수정주의를 넘어서』(서울 : 나남, 1990), pp.276-295를 참조.

59) Marshall Shulman, Stalins Foreign Policy Reappraised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1963), p. 141.

60) Adam Ulam, The Communists : The Story of Power and Lost Illusions: 1948-1991 (New York and Toronto: Charles Scribners Sons, 1992), pp. 81-82.

61)  예프게니 바자노프ž나딸리아 바자노바,「소련의 자료로 본 한국전쟁의 전말」, pp. 53-54.

62)  Ibid., p. 43.

63) 스탈린은 1926년부터 중국국민당을 혁명주력세력으로 평가하면서 마오쩌둥의 중국공산혁명을 오히려 방해하고 분단까지 기도하였으며 1945 2월 이후 세계 제2차 대전 종전 협의 과정에 대련, 여순, 동청철도와 남만철도 등 만주에 대한 특수지위를 확보하였다. 상세 설명은 송종환(1999), pp.193- 198을 참조.

64) 모택동은 1956년 3월 31 중국 주재 유딘 대사와의 면담 시 스탈린이 중국공산당 창당이후 국민당 정부를 지지하면서 중국공산혁명을 방해한 행위를 각종 사례를 들어가면서 비난하였다. 유딘 대사의 본부 보고 전문의 영문역은 CWIHP Bulletin, Issues 6-7, pp. 164-167을 참조.

65) 예프게니 바자노프ž나딸리아 바자노바,「소련의 자료로 본 한국전쟁의 전말」, p. 107.

66) Goncharov et al., Uncertain Partners: Stalin, Mao and the Korean War, p.139,143; Weathersby,Soviet Aims in Korea and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1945-1950p.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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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부칼럼] 공산권자료로 본 625전쟁 재평가(4) - 국가정보학 - 2010. 7. 21. 16:09

남북관계가 천안함 사건 등으로 경색되고 있으며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 한반도 상황이 어떻게 흐를지 모르는 상황에서 주변국의 대한반도정책은 복잡해지고 있는 양상이다. 2010년은 625발발 60주년, 419혁명 50주년 등으로 다양한 이해단체들이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만, 모두 과거에 얽매여 있고, 막상 대한민국의 미래를 향한 대안제시를 하지는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이 글은 송종환 명지대 북한학과 초빙교수가 2010년 6월4 자유민주연구학회가 주최한 6.25 60주년 기념 세미나에서 발제문으로 발표한 것을 소개한다. 625를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글이 아닌가 싶다.

 

<6.25 60주년기념 특집>

 

공산권 자료로 본 6·25 전쟁 재평가(4): 러시아 측이 공개한 비밀문서를 중심으로*

 

4. 스탈린, 전쟁과 휴전협상의 장기화 유도

1950 9 15 유엔군이 인천상륙 작전을 한 후 9 28일 한국군과 함께 서울을 수복, 북한의 패색이 짙어지자 스탈린은 9 30일 소련공산당 정치국회의를 소집, 협의를 한 후 외무성으로 하여금 유엔에 제출할 소련 측 정전결의안을 초안하도록 지시하고 10 1일 즉각 정전, 외국군 철수 및 국제 감시 하 총선 등 요지의 초안을 마오쩌둥과 협의 후 유엔주재 소련대표부로 타전하였다.(42)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 후 승기를 잡은 상황에서 미국과 영국이 주도하는 유엔총회 정치위원회는 10 4일 상기 소련 측 결의안을 부결시켰으며 이어 유엔총회는 찬성 47, 반대 5, 기권 7표로 북한 패배 후 유엔주관으로 한반도에서의 통일 자주 민주국가 수립을 위한 선거 실시 등 요지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동 결의안 표결이 있는 날 워커(Walton Walker)장군의 제1기병부대의 선두는 38선을 돌파하였다.(43)

그러나 10 19일 밤 중국군이 압록강을 도강하여 공격에 나서자 유엔군과 한국군은 다시 후퇴, 전황이 어렵게 된 상황에서 12월 유엔주재 인도, 영국, 스웨덴 대표와 리(Trygve Lie) 사무총장은 중국 대표에게 중국이 수락할 정전조건 제시를 요청하였다이에 대하여 주우언라이는 12 7일 한반도에서의 모든 외국군 철수, 대만 및 대만 해협으로부터의 미군 철수, 한국문제는 한국인 스스로 해결, 중국정부 대표의 유엔 참여 및 대만정부 대표 축출, 일본과의 평화조약준비를 위한 4강국 외상회의 개최 등의 정전 조건을 스탈린에게 제시하면서 그의 의견을 문의하였다.(44)

같은 날 스탈린은 소련 공산당 정치국의 유엔주재 비신스키대사앞 훈령에서  미국이 패퇴를 거듭함에 따라  완패를 모면하고 시간을 벌기 위하여 한반도에서의 군사 활동 중지에 관한 제의를 빈번히 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주은래가 제시한 정전조건들은 적절치 않다고 답변하였다.(45)  스탈린은 같은 날 주우언라이에게 보낸 전문에서도 서울이 아직 해방되지 않은 시점이므로 중국 측이 모든 카드를 제시할 때가 아니라고 하면서 주우언라이가 미국과 유엔이 먼저 정전조건을 제시토록 하는 전략을 택할 것을 제시하였다.(46)  유엔 측이 다시 1951년 1월 11 정전 제안을 해왔을 때 주우언라이는 스탈린에게 문의, 그의 권고에 따라 유엔 측 제안을 거부하였다.(47)

1951 6 5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보내는 전문에서 한반도에서 장기전은 중국군이 전장에서 현대전을 연구할 기회를 갖게 될 뿐만 아니라 트루먼(Harry S. Truman) 정부를 흔들고 미·영국군의 국제적 위신을 실추시킬 수 있기 때문에 한국전쟁의 속도를 빠르게 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48) 이 당시 마오쩌둥은 국제관계에서의 중국의 위치를 높이고 중국내 혁명분위기를 고양시키기 위하여 미국으로부터 수락할 만한 조건을 확보할 때까지 전쟁을 계속할 의향을 가지고 있었지만(49) 전쟁 종료 시까지 입을 수많은 사상자 때문에 상기 스탈린의 장기전 요구에 대하여 적극적이지는 않았을 것으로 상상된다.

그러나 1951 4월과 5월 중공군과 북한군의 대공세 실패는 스탈린으로 하여금 유엔군 사령부와의 휴전협상을 개시토록 압박하였다. 1951년 6월 5 말리크(Jacob Malik) 주유엔 소련대사는 평화를 원하며 가급적 빠른 시일 내 한국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원한다고 하면서 미국정부가 이 문제에 관하여 북한과 중국 측과 접촉해 줄 것을 케난(George F. Kennan)에게 통보하였다.(50)  몇 일 후 김일성과 가오강(高崗, 만주에 위치하고 있던  중국의 친소인사로서 1955년 숙청됨.)은 동 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스탈린을 방문하였다

마오쩌둥이 6, 7 2개월간은 중공군과 북한군이 수세적 위치에 있으므로 유엔군사령부와 협상을 개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제시해옴에 따라 스탈린은 협상개시를 위하여 필요한 조치를 취하도록 말리크대사에게 지시하였다.(51) 1951 7월부터 1953 7월까지 계속된 휴전협상의 초기단계에 마오쩌둥은  중국 측이 만족할 조건들을 확보할 경우 휴전협정을 체결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52) 그러나 스탈린은 미국이 휴전협정을 체결해야 할 더 급박한 필요가 있다고 하면서 중국과 북한 측은 서두르거나 협상의 조기 종결의사를 보이지 않고 계속 강경입장을 견지토록 종용하였다.(53)

교착상태에 있었던 휴전협상은 1953 3월 스탈린 사망 후 급진전을 보게 된다스탈린 사후 2주 후 3 19일 소련 각료회의는 한국전쟁을 조기 종결토록 결정을 하였는바, 동 결정은 스탈린이 한국전쟁 계속의 주요인이었으며 그가 죽은 뒤 곧 소련, 중국, 북한이 휴정협정체결을 위한 조치들을 취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54) (계속)

<필자 주>

42) Mansourov, Stalin, Mao, Kim, and Chinas Decision to Enter the Korean War, September 16-October15, 1950,pp. 98-99.

43) Ibid., p. 101.

44) Weathersby, New Russian Documents on the Korean War, p. 32; 외무부,「한국전 문서요약」,   p. 60; 관련 영문번역 전문(문서 47) CWIHP Bulletin Issues 6-7, p. 52를 참조.

45) Weathersby, New Russian Documents on the Korean War, p. 32; 외무부,「한국전 문서요약」, pp. 60-61; 관련 영문번역 전문(문서 48) CWIHP Bulletin Issues 6-7, pp. 52를 참조.

46) Weathersby, New Russian Documents on the Korean War, p. 34; 관련 영문번역 전문 (문서 49) CWIHP Bulletin Issues 6-7, pp. 52-53을 참조.

47) Weathersby, New Russian Documents on the Korean War, p. 34; 관련 영문번역 전문 (문서 52) CWIHP Bulletin Issues 6-7, pp. 54-55를 참조.

48) Weathersby, New Russian Documents on the Korean War, p.34; 관련 영문 번역전문 (문서65) CWIHP Bulletin, Issues 6-7, p. 59를 참조.

49) Chen Jian은 모택동이 한국전쟁 시 북한을 지원한 동기는 유엔군의 중국 국경 접근에 따른 안보 위협보다 국제적으로 신생 중국의 위신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Jian, Chinas Road to the Korean War, pp. 211-223. 

50) Kennan to Matthews, 5 June 1951, in U. S. Department of State, FRUS, 1951, Vol. VII(pt.1), pp. 507-511.

51) Weathersby, New Russian Documents on the Korean War, p. 35, 말리크 대사는 6 23일 유엔 라디오 망을 통한 연설로 휴전 협상을 제의하였다.

52) Weathersby, New Russian Documents on the Korean War, p. 35; 관련 영문번역 전문(문서 84~88) CWIHP Bulletin, Issues 6-7, pp. 66-69를 참조.

53) Weathersby, New Russian Documents on the Korean War, p. 35; 관련 영문번역 전문(문서 95) CWIHP Bulletin, Issues 6-7, pp. 72를 참조.

54)Weathersby, New Russian Documents on the Korean War, pp. 34~35; 관련 영문번역 전문(문서 112) CWIHP Bulletin, Issues 6-7, pp. 80-83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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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부칼럼] 공산권 자료로 본 625전쟁 재평가(3) - 국가정보학 - 2010. 7. 19. 16:13

남북관계가 천안함 사건 등으로 경색되고 있으며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 한반도 상황이 어떻게 흐를지 모르는 상황에서 주변국의 대한반도정책은 복잡해지고 있는 양상이다. 2010년은 625발발 60주년, 419혁명 50주년 등으로 다양한 이해단체들이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만, 모두 과거에 얽매여 있고, 막상 대한민국의 미래를 향한 대안제시를 하지는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이 글은 송종환 명지대 북한학과 초빙교수가 2010년 6월4 자유민주연구학회가 주최한 6.25 60주년 기념 세미나에서 발제문으로 발표한 것을 소개한다. 625를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글이 아닌가 싶다.

 

<6.25 60주년기념 특집>

 

공산권 자료로 본 6·25 전쟁 재평가(3): 러시아 측이 공개한 비밀문서를 중심으로*

 

3. 스탈린, 한국전쟁에의 중국 참전 유도

스탈린이 1950년 1월 30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승인한 배경에는 스탈린 자신이 설명하고 트루먼 행정부가 우려한 바와 같은 1949년 기간 중에 있은 국제환경 변화가 있었다. 소련이 미국과 함께 원자탄을 보유하게 되고 중국공산혁명의 성취로 아시아 지역에서 전략적 상황이 공산권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시기에 미국이 한반도가 미국의 방위선 밖에 있음을 선언하자 스탈린은 세계적화전략의 일환으로 한국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이고 이러한 견해가 이제까지 전통적 견해가 되어왔다.

이러한 견해는 소련의 대중국 관계에 대하여는 내색을 하지 않고 ‘국제환경 변화’만을 언급한 스탈린의 말을 고지식하게 믿고 그의 진의를 간과하는 것이다.

독일 동구·국제문제 연방연구소 하인지그(Dieter Heinzig)부소장이 러시아대통령실 문서고에서 직접 열람한 1956년 3월 31 북경 주재 유딘 대사의 모택동 면담 기록 원본에 의하면, 모택동은 “[1949 12월부터 1950 2월 모스크바 방문 시] 스탈린과 북한을 강화하는 문제에 대하여는 의논이 있었지만 남한정복문제에 대하여는 전혀 협의가 없었다”고 말하였다.(24)

그러나 스탈린은 한국 전쟁에 대하여 마오쩌둥과 먼저 협의하였다. 1949년부터 12월부터 1950 2월 마오쩌둥의 모스크바 방문 후반기에 북한의 남한 공격의 실현 가능성에 대하여 토의를 했다는 몇 가지 증거들이 있다. (25)소련비밀문서 공개 시 중요한 역할을 한 볼코고노프(D.Volkogonov) 장군은 마오쩌둥의 모스크바 방문 시 스탈린과 1950년 초 여름이 대만과 한반도문제를 완전히 결정짓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라는 데 의견일치를 보았다고 주장하였다.(26)

소련이 직접 싸우지 않고 중국을 내세우려는 의도를 가진 스탈린은 마오쩌둥과 한반도 전쟁을 개략적으로 합의한 후 김일성에게 중국 동의 조건 부 한국전쟁 개시 승인을 하였으며 한국전 개전 후 중국을 한국전에 끌어들이기 위하여 필사적 노력을 하였다.

1950 5 14자 스탈린의 모택동 앞 전문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김일성 48번에 걸쳐 남침 승인 간청 전문(27)을 보낸 후 1950 4월 모스크바를 방문하였을 때 스탈린은 “변화된 국제환경” 때문에 군사력에 의한 김일성의 통일을 승인한다고 하면서  “남침에 대한 최종결정은 중국과 북한이 함께 내려야 하며 만일 중국이 동의하지 않으면 미루어야 한다”고 말하였다고 한 것은 앞에서 제시한 바 있다.

구 소련 공산당 국제부의 김일성의 소련방문에 관한 보고서에 의하면, 스탈린은 1950 4월 모스크바를 방문해온 김일성에게 소련이 전쟁에 직접 참여해줄 것으로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소련이 서쪽 방면에서 대처해야 할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고 미국이 한반도에 군대를 파견할 경우 직접 개입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므로 무력통일을 위한 남침은 중국 지도부가 이를 찬성할 때만 개시될 수 있음을 강조하였으며(28) 5 14일에는 마오쩌둥에게 이를 확인해 주었다.

스탈린은 한국과 유엔군의 반격 특히 미군기의 공습으로 김일성의 사기가 저하되고  전세가 북한군에게 불리하게 되자 다시 중공군의 참전을 중국지도부에 촉구하였다. 1950년 7월 5 스탈린이 중국 주재 로신 대사를 통하여  주우언라이(周恩來)외상에게 보낸 암호전문은 한국전쟁 참전여부를 협의 결정하기 위하여 7월 중순 개최된 중국 공산당 지도부 회의에 앞서 중국지도부가 중공군의 한·만 국경지대로의 이동문제를 스탈린과 협의한 것을 밝히고 있다. 스탈린은 동 전문에서 적군 (한국군과 UN) 38선을 넘게 될 경우 북한군을 돕기 위하여 중공군 9개 사단을 한 만 국경지대에 집결 시키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면서 이들에 대한 공중엄호를 약속하였다.(29) 7 13일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보내는 전문에서 중공군 9개 사단 엄호를 위하여 제트기 124대로 구성된 1개 항공사단을 보낼 것을 약속하고 2-3 개월간 중국 측 조종사 훈련과 훈련 후 장비 이전을 통보하였다.(30)

9 16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후 북한군이 후퇴를 거듭함에 따라 절망상태에 빠진 김일성 9 28일 노동당 중앙위 정치위원회를 개최, 적군이 38선을 돌파하게 되면 소련군이 직접 지원해줄 것과 소련군의 직접지원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중국과 기타 공산 국가들로 국제의용군을 조직, 원조하여 줄 것을 요청하는 서한을 스탈린에게 보내기로 결정하였다.(31) 스탈린은 101새벽 2 50 9 29일자 김일성 박헌영 공동 명의 전문을 받고(32) 3 마오쩌둥과 주우언라이에게 최소한 5~6개 사단의 중국 의용군을 38선 방향으로 진격시켜 북한군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하는 전문을 발송 하였다.(33)

상기 스탈린의 중국 참전 요청 전문에 대하여 마오쩌둥은 10 2일자 스탈린에게 보내는 전문에서 중국은 최초 적군이 38선을 돌파할 경우 의용군 4개 사단을 파견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여타 지도자들과 세부검토를 한 결과 (1) 중공군의 준비부족, (2) 중공군 참전 시 미 중 전쟁이 될 가능성 및 이 경우 중 소 동맹조약에 의거, 소련군의 참전 불가피, (3) 중공군 참전 시 미국의 중국 내 반동세력 준동 사주 가능성 등의 이유를 내세워 당분간은 의용군을 파견치 않고 인내심을 보일 필요가 있다고 하면서 앞으로 북한군은 유격전 형태로 투쟁해야 한다고 말하였다.(34)

이에 대하여 10 5일 스탈린은 마오쩌둥과 주우언라이에게 보내는 전문에서 미국은 현 상태에서는 큰 전쟁을 치를 준비가 되어있지 않고 일본은 군사적 잠재력은 있으나 아직 회복되지 않은 상태이므로 소련을 배후에 둔 중국의용군 참전은  한반도문제를 북한에 유리한 방향으로 미국이 양보토록 압박하고 한반도가 대륙침략의 도약대가 될 가능성을 사전 방지할 수 있으며 미국으로 하여금 대만을 포기케 할 것이라고 하면서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을 촉구하였다.(35)

스탈린은 이어 10 8김일성에게 보내는 전문에서 마오쩌둥이 10 7 9개 사단을 조만간 북한에 파견할 예정임을 자신에게 알려왔음을 통보하면서 김일성이 적군과의 전투에서 결연히 임할 것을 촉구하였다. 마오쩌둥도 10 8일 밤 평양주재 중국대사를 통하여 중공의용군의 참전을 김일성에게 통보하였다.(36)

그러나 10 9-10일간 중국의 북한지원 문제를 구체적으로 협의하기 위하여 소련을 방문한 주우언라이와 린뱌오(林彪)가 여러 이유를 내세워 마오쩌둥의 참전결정을 번복 하려는 태도를 보이자 스탈린은 위험을 무릅쓰고 최후카드를 제시하였다. 10 13일 스탈린은 중국의 참전 지원에 대하여 미국이 중국을 공격 보복할 가능성이 없으나 지금 중국이 참전하지 않으면 북한은 매우 짧은 시일 내에 붕괴될 것이므로 중국은 중국 북동지역에 북한인민군을 재배치하고 소련은 연해주 지역에 북한계 소련인과 부상병, 노약자를 이동시켜 북한 재진입을 위한 피난처를 각기 제공하자고 하면서 일단 북한을 포기하는 최종 제의를 중국 측에 하고(37) 10 13일 쉬티코프 대사를 통하여 북한군 철수계획을 김일성에게 실제로 제시함으로써(38) 마오쩌둥의 한국전쟁 참전 최종 결심을 유도하였다.(39)  스탈린은 이와 같이  중국을 한국전쟁에 필사적으로 끌어들이도록 노력을 하였으며 마지막에는 북한 포기라는 최악의 상황을 제시하여 중공의 한국전 참전을 얻어 내었다.

1950 11월 미 공군이 미그기를 격추함으로써 알 수 있게 되었지만, 한국전쟁 개전 전부터 군사고문을 북한에 파견하고 있던 스탈린은 중공 지상군이 한반도에 진입할 무렵 중공군을 유엔군 전투기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소련 전투기들은 중공 국적표지를, 조종사들은 중공 공군복을 입는 등 중공 전투기로 위장하여 실제로 참전시켰다. 그들은 주로 청천강 이북~압록강 이남지역인 소위 '미그회랑'에서 유엔 전투기와 치열한 공중전을 벌였고 방공요격 임무에 치중했다.

당시 미국은 소련 공군의 철저한 위장으로 인해 중공 공군으로 인식했고 이러한 인식은 이후 상당기간 지속되었으며 1953년 7월 27 정전 때까지 소련은 14개 전투비행사단 2 6000명의 병력을 선양, 안산, 안둥(현재 단둥) 등 중공군 기지에 주둔시켰고, 6 3229회 출격해 1790 여회의 공중전을 벌였으며(40) 모두 335대의 비행기와 120명의 조종사를 잃었다는 사실이 공개된 소련 문서를 통해 확인되었다.(41)(계속)

<필자 주>

24) Dieter Heizig, Stalin, Mao, Kim and Korean War Origins, 1950 : A Russian Documentary Discrepancy, CWIHP Bulletin, Issues8-9(Winter1996/1997), p. 240. 러시아 측이 추후 공개한 동 전문은 (CWIHP Bulletin, Issues 6-7, pp. 164-167 참조)에는 마오쩌둥이 한국전쟁에 대하여 언급한 부분이 삭제되어 있다.

25) Chen Jian, Chinas Road to the Korean War: The Making of the Sino-American Confrontation (New York :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4), pp. 85-91; John Merrill은 흐르시쵸프 회고록의 최초 테잎에 기초하여 스탈린이 북한의 남침계획에 대해 문의하자 마오쩌둥은 동의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고 주장하였다. Goncharov et al., Uncertain Partners: Stalin, Mao and the Korean War, p. 130.

26) Dmitrii Volkogonov, Stalin: Triumf I tragediya(Moskva,1989), tomII. Part 2, p. 108, 신승권, 「소련의 한국에 대한 정책목표분석」(서울 : 집문당, 1966), p. 50에서 인용.

27) Kathryn Weathersby, New Findings on the Korean War : Translations and Commentary, CWIHP Bulletin, Issue 3(Fall1993),p.14.

28) 예프게니 바자노프ž나딸리아 바자노바, 「소련의 자료로 본 한국전쟁의 전말」, pp. 53-54.

29) Weathersby, New Russian Documents on the Korean War, p. 31; 외무부, 「한국전 문서요약」, p. 33; 관련 영문번역 전문(문서 18) CWIHP Bulletin, Issues 6-7, p. 43을 참조.

30) Weathersby, New Russian Documents on the Korean War, p. 31; 관련 영문 번역 전문(문서 22) CWIHP Bulletin, Issues 6-7, p. 44를 참조.

31) Alexander Y. Mansourov, Stalin, Mao, Kim, and Chinas Decision to Enter the Korean War, September 16-October 15, 1950 : New Evidence from the Russian Archives, CWIHP Bulletin, Issues6-7,p.98.

32) 외무부, 「한국전 문서요약」, pp. 53~54; 영문번역 전문(문서 6) CWIHP Bulletin, Issues 6-7, p. 111-112을 참조.

33) Mansourov, Stalin, Mao, Kim, and Chinas Decision to Enter the Korean War, September 16-October 15, 1950, pp. 98-99; 외무부, 「한국전 문서요약」, p. 55; 영문번역 전문(문서 10) CWIHP Bulletin, Issues 6-7, p. 114를 참조.

34) Mansourov, Stalin, Mao, Kim, and Chinas Decision to Enter the Korean War, September 16-October 15, 1950, p. 100; 외무부, 「한국전 문서요약」, p. 55; 영문번역 전문(문서 12) CWIHP Bulletin, Issues 6-7, pp. 114-115를 참조.

35) Mansourov, Stalin, Mao, Kim, and Chinas Decision to Enter the Korean War, September 16-October 15, 1950, p. 101; 영문번역 전문(문서 13) CWIHP Bulletin, Issues 6-7, p. 116을 참조.

36) Mansourov, Stalin, Mao, Kim, and Chinas Decision to Enter the Korean War, September 16-October 15, 1950,CWIHP Bulletin, Issues 6-7, p. 102.

37) Ibid., pp. 102-103.

38) Ibid., p. 104; 관련 영문번역 전문(문서 14) CWIHP Bulletin, Issues 6-7, p. 118.

39) Ibid.; 중국 측 입장에서 논술한 중공의용군의 한국전 참전 결정 경위에 대한 상세 내용은 Goncharov et al., Uncertain Partners: Stalin, Mao and the Korean War, pp. 168-202를 참조.

40) 이근석, “소련 공군 MIG-15 참전,”『조선일보』, 2010. 5. 19, A8.

41) F. Krivosheev, Soviet Casualties and Combat Losses in the Twentieth Century, Christine Barnard, trans.(Pensylvania: Stackpole Books, 1997), p. 281, 김영호(2006), p. 16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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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부칼럼] 공산권자료로 본 625전쟁 재평가(2) - 국가정보학 - 2010. 7. 17. 16:16

남북관계가 천안함 사건 등으로 경색되고 있으며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 한반도 정황이 어떻게 흐를지 모르는 상황에서 주변국의 대한반도정책은 복잡해지고 있는 양상이다. 2010년은 625발발 60주년, 419혁명 50주년 등으로 다양한 이해단체들이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만, 모두 과거에 얽매여 있고, 막상 대한민국의 미래를 향한 대안제시를 하지는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이 글은 종환 명지대 북한학과 초빙교수가 2010년 6월4 자유민주연구학회가 주최한 6.25 60주년 기념 세미나에서 발제문으로 발표한 것을 소개한다. 625를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글이 아닌가 싶다.

 

<6.25 60주년기념 특집>

 

공산권 자료로 본 6·25 전쟁 재평가(2): 러시아 측이 공개한 비밀문서를 중심으로*

 

2. 스탈린의 결단·승인·작전계획에 따라 김일성 남침 개시

1992년부터 러시아 측에 의하여 공개된 세 가지 종류의 한국전쟁 관련 비밀문서들은 한국전쟁이 남한의 북침에 대한 북한의 반격이라고 되풀이해 온 구 소련과 북한 측의  주장이  거짓 선전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스탈린에 의하여 계획되고 소련 군사고문관들이 작성한 군사작전계획에 따른 북한 측의 남침이며 김일성의 역사적 결단에 의한 전쟁이 아니라 스탈린의 전쟁임을 밝혀 주고 있다. , 김일성이 남침 전쟁의 승인을 수차례 스탈린에게 요구하고 그의 승인을 득한 후 남침전쟁의 주연을 맡았지만 전쟁 개시나 그 시기가 김일성의 뜻에 의하여 결정되지 않았다

1997 7 14자 뉴스위크지는「역사의 교훈 제2장」제하 특집기사에서 중국 공산당의 공식 기관지인 「百年潮流」가 지난 40년간 중국 공산당이 고수해온 남한에 의한 북침 주장을 포기하면서 “한국전쟁은 스탈린이 주도하였고 김일성 2주안에 남한을 점령할 수 있다고 믿은 과격주의자였으며 마오쩌둥은 여기에 동조했다고 기술하였다”고 보도하였다. 또한 동 기관지는 마오쩌둥의 한국전쟁 참전결정을 비판하면서 “한국전쟁은 지금까지 중국이 주장해온 것처럼 영광스러운 승리가 아니라 스탈린의 수중에서 놀아나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실익(實益)을 침해한 대실수였다”고 주장하였다.(6)

스탈린은 소련 주도로 한반도 북반부에서 공산화체제를 구축하고 있었지만 1950 1월까지는 세계 제2차 대전 기간 중 미국 등 연합국과의 합의에 의하여 정한 경계선을 넘어 남한에까지 적극적으로 소련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 오히려 무력에 의하여 통일을 성취하려는 북한 지도자들의 주장을 거부하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옐친대통령이 1994 6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영삼 대통령에게 제공키 위하여 한국전 개전에 관하여 정리한 216건의 『한국전쟁 관련 러시아 외교문서』에 의하면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무력통일을 위한 대규모 남침의사를 최초로 밝힌 것은 1949년 3월 5 모스코바에서의 스탈린 김일성 간 회담에서 김일성이 무력통일을 위한 남침에 대한 소련 지도부의 의견을 문의하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이 때 스탈린은 한국군과 한국 주둔 미군규모, 남북한 군대의 우열을 질문한 후 북한군이 절대적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답변하고 남한에 미군이 아직도 주둔하고 있음(소련군은 1948 12월 북한에서 철수)과 미·소간 38선 분할에 관한 합의를 상기시켰다또한 스탈린은 북한의 남한에 대한 공세적 군사 활동은 남한의 북한 침공을 반격하는 경우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남침을 승인하지 않았다.(7)

북한은 1949년 8월 4 새벽 5 최현의 지휘 하에 두 개 연대 병력과 포병부대를 동원하여 옹진반도의 두락산, 운동, 국사봉을 공격하는 대규모 38분계선 분쟁을 일으켰다.(8) 이어서 북한은 8 12김일성·쉬티코프(Shtykov) 대사 면담과 9 3김일성의 러시아어 통역관 문일·툰킨(G. I. Tunkin)공사 면담 시 1949 7월 남한에서 미군이 철수한 후 38선은 이미 그 의미가 상실되었다고 하면서 대남 전면 공격과 최소한 옹진반도 점령 계획을 제시하였다.(9)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스탈린은 9 11김일성의 요청이 대부분의 주한미군이 철수한 시점에 제기되었음을 감안하여 호의적 관심을 보이면서 휴가 중인 쉬티코프 대사를 대리하고 있던 툰킨 공사가 김일성을 조속히 면담, 8 12일 및 9 3일자 북한 측 제의 사항과 관련하여 남북한의 정치 군사정보와  현지 대사관 의견을 보고토록 지시하였다.(10)

9 14일자 전문  보고 시  툰킨 공사는 9 12일과 9 13김일성과의 면담 시 김이 종전과는 달리 확신을 주지 못하는 어조로 현 상황에서 속전속결에 의한 승리는 기대할 수 없으므로 전면전을 조기에 개시하는 대신 옹진반도와 해주 인근까지를 점령할 것을 제의하였다고 보고하였다아울러 동 공사는 인민군이 남침 시 남한 내 빨치산의 지원을 받는다고 하여도 신속히 승리할 만큼 강하지도 못하고 미국의 강력한 군사개입으로 전쟁이 장기화될 것이므로 남침이 시기적으로 적절치 않다는 현지 대사관 의견을 보고하면서 옹진반도 점령과 같은 제한적 작전 수행이 내전으로 확대되지 않더라도 이는 미국의 성공적 반소 캠페인에 이용되어 소련에 유익하지 않으므로 가치가 없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11)

이러한 평양주재 대사관의 보고를 받고 스탈린은 소련공산당 중앙위 정치국 명의로 9 24일 평양주재 대사에게 하달한 훈령에서 남한 내 빨치산 활동 강화계획은 승인하되, 전면적 남침이나 옹진반도 점령 작전은 미국의 개입으로 분쟁이 장기화됨으로써 통일이 지연될 것이라는 이유로 시기적으로 적절치 않음을 강조하였다또한 옹진반도 점령도 남한의 공격이 있을 경우 이들이 북한 영역으로 들어오도록 한 뒤 반격작전을 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12)

해가 바뀌어 1950년 1월17 북경 향발 이두연 북한 대사를 위한 박헌영 외상주최 오찬 시 김일성 2명의 참사관급 소련 외교관 이그나티에프(Ignatiev)와 페리센코(Pelishenko)에게 이제는 중국의 통일이 완료되었으므로 남한을 해방시킬 차례라고 언급하면서 그 동안 남한 측의 대북한 공격이 없었기 때문에 1949년 3월 5 스탈린에게서 승인을 받은 반격형태로서의 대남공격을 할 수 없었으므로 남한해방을 위한 인민군의 대남 공격 승인을 받기 위하여 스탈린을 방문할 것을 제기하였다. 김일성은 이어 “자신이 공산주의자이며 상부의 규율을 지키는 사람이며 스탈린이 그에게 법이기 때문에 [그의 승인 없이는] 공격을 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김일성의 상기 언급 내용을 청취한 소련 대사관원들이 이 문제에 대한 대화를 회피하고 일반 문제로 대화주제를 바꾸려 하자 김일성은 쉬티코프 대사에게 접근하여 1949 6월 모택동도 중국혁명이 끝나면 북한을 돕겠다고 약속한 바가 있다고 하면서 자신이 남한공격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스탈린을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어 김일성 3일 만에 끝날 수 있는 옹진작전을 스탈린이 허가해주지 않는다고 하면서 총공격 시에는 몇 일 내에 서울을 점령할 수 있다고 강조하였으나 쉬티코프는 옹진작전은 불가능하다고 답변하였다.(13)

스탈린은 상기 대화에 관한 쉬티코프의 비밀 전문을 비신스키(Andrei Vyshinsky) 외상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후 1 30일 쉬티코프 대사에게 하달한 전문에서 “김일성의 불만은 이해가 되나 그가 남한에 대하여 하고자 하는 큰 일은 많은 준비가 필요하며 위험이 없도록 잘 조직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김을 만나 동 문제를 의논할 용의가 있으며 그를 도울 의사가 있다”는 자신의 의사를 김일성에게 전달토록 지시하였다.(14)

스탈린은 자신이 선택한 시기의 한국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하여 1950 2월과 3월 중 북한 내 전쟁준비를 감독하기 시작하였다. 스탈린은 중국과 협의한 후 2 9일 군사적 방법으로 통일을 달성하겠다는 평양 측의 의도에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의사를 표명하면서 한반도에서 대규모 군사작전의 준비를 시작해도 좋다고 허락을 하였다. 그 후 소련은 북한을 향해 탱크, 탄약, 군 장비, 대포, 의약품 및 석유 등을 적극적으로 공급하기 시작하였다.(15)

2 4김일성은 북한의 추가 창설 3개 보병사단용 무기 구입을 위하여 1951년도 소련의 대북한 차관을 1950년도 중에 사용할 수 있도록 스탈린의 허가를 구해줄 것을 쉬티코프 대사에게 요청하고(16) 3 9일 추가로 1 2-5천만 루불 상당의 무기 구입을 요청하는 공한을 쉬티코프 대사를 통하여 소련 정부에 송부하였다.(17) 이에 대하여 소련 측은 3 12자 비신스키외상의 쉬티코프 대사앞 전문과 3 18일자 스탈린의 김일성 앞 메시지를 통하여 동의하였다.(18) 또한 스탈린은 2 23일 쉬티코프 대사가 겸직하고 있던 북한인민군 군사고문단장직에 전쟁영웅 바시리에프(Vasiliev)중장을 임명하였다.(19)

러시아정부가 한국정부에 제공한 소련 측 비밀문서는 김일성박헌영 1950년 3월 30 평양을 떠나 모스크바를 방문한 후 4 25일 평양으로 귀환하였음을 밝히고 있지만,(20) 상세 모스코바 체류 일정과 스탈린과의 대화 내용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스탈린과 김일성간의 대화 시 스탈린이 강조한 내용은 5김일성이 중국을 방문하여 남한 공격에 대한 스탈린의 방침을 설명하자 마오쩌둥이 이를 스탈린에게 확인하는 전문을 타전한 데 대하여 스탈린이 답변을 해주는 5 14일자 전문에 나타나 있다스탈린은 1950 4월 모스코바 회담에서 김일성에게 국제환경이 변하고 있다고 하면서 북한이 통일과업을 개시하는데 동의하되, 이 문제의 최종 결정은 중국과 북한이 함께 내려야 하며 만일 중국 측의 의견이 부정적이면 새로운 협의가 이루어 질 때까지 이 문제의 결정을 연기하자고 제의하여 북한 측과 합의하였다(21)고 하면서 김이 마오쩌둥에게 설명한 내용을 확인해주었다.

스탈린은 김일성이 끈질기게 남침 승인을 요청하였기 때문에 승인을 한 것이 아니라 1949년 수차에 걸친 김일성의 남침 승인 요청을 거부하였던 것처럼 당시 국제정세와 한국전 개전 시 소련의 손익을 면밀히 계산한 기초 위에 남침을 승인하는 결정을 내렸다. 스탈린이 1949년 기간 동안 계속 김의 남침승인 요청을 거부하고 38선에서의 무력충돌이 전면전으로 비화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쉬티코프 대사로 하여금 철저히 감독을 하도록 10월 이후 수차에 걸쳐 지시(22)하였던 것과는 달리 태도를 바꾸어 1950년 1월 30 전문에서 김일성의 남침을 승인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게 된 이유를 밝히는 자료로서는 상기 5 14일자 스탈린의 모택동 앞 전문과 “변화된 국제환경”에 대한 스탈린 자신의 설명을 수록한 보고서가 있다.

러시아대통령실 문서고에 소장되어 있는 김일성의 모스크바 방문에 관한 구 소련공산당 국제부 보고서는 “변화된 국제환경”에 대한 스탈린 자신의 설명을 기술하고 있다. 그는 1949 8월 소련의 원자탄 보유, 10월 중국공산당의 승리, 1950 1월 중 구체화되어 가고 있던 중·소 우호, 협력, 상호 원조조약(The Treaty of Friendship, Alliance, and Mutual Assistance, 이하 중·소 동맹조약으로 약칭)의 체결로 중국이 북한을 도울 수 있고 또 미국이 아시아 지역에서 공산주의에 도전하는데 더욱 주저하게 될 것이라고 김일성에게 말하였다.(23) 그러나 그는 1 12일 한국이 미국의 방위선 밖에 위치한다고 한 미국 애치슨(Dean Acheson) 국무장관의 선언에 대하여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았다. (계속)

<필자 주>

6) Newsweek, July 14, 1997, pp. 28-29.

7)  Kathryn Weathersby, Korea, 1949-50 : To Attack or not to Attack?  Stalin, Kim Il Sung, and the Prelude to War,CWIHP Bulletin, Issue5(Spring1995),p. 2; 외무부, 「한국전 문서요약: 1949.1-1953. 8(1994), p. 4.

8) 김영호(2006), p. 53.

9)  Weathersby, Korea , 1949-50 : To Attack and not to Attack? p. 2.; 외무부, 「한국전 문서요약」, pp. 10-12;  93일자 면담내용에 대한 영문번역 전문(電文) CWIHP Bullentin, Issue 5, p. 6을 참조.

10) Weathersby, Korea, 1949-50 : To Attack or not to Attack? p. 2; 외무부, 「한국전 문서요약」, pp. 12-13;  관련 영문번역 지시 전문은 CWIHP Bulletin, Issue 5, p. 6을 참조.

11) Weathersby, Korea, 1949-50 : To Attack or not to Attack?p. 3, 외무부, 「한국전 문서요약」, pp. 13-15;  914일자 영문번역 전문은 CWIHP Bulletin, Issue 5, pp. 6-7.

12) Weathersby, Korea, 1949-50 : To Attack or not to Attack? p. 3; 외무부, 「한국전 문서요약」, pp. 17;  924일자 영문번역 지시 전문은 CWIHP Bulletin, Issue 5,. pp. 7-8을 참조.

13) 쉬티코프는 117일 오찬 모임에서의 김일성 언급내용을 119일 비신스키외상 앞 전문으로 보고했는 바, 동 영문번역 전문은 CWIHP Bulletin, Issue 5, p. 8을 참조.

14) Weathersby, Korea, 1949-50 : To Attack or not to Attack? p. 3; 외무부, 「한국전 문서요약」, p. 21; 관련 영문번역 지시전문은 CWIHP Bulletin, Issue 5, p. 9를 참조.

15) 드미트리 안토노비치 볼코고노프 저, 김일환 5인 역, 「레닌에서 고르바쵸프까지, 크렘린의 수령들」, 상권(서울 : 한송, 1996), p. 342.

16) Kathryn Weathersby, New Russian Documents on the Korean War : Introduction and Translation,CWIHP Bulletin, Issues 6-7(Winter 1995/1996), p. 30; 외무부, 「한국전 문서요약」, p. 22; 관련 영문)     번역 전문(문서2) CWIHP Bulletin, Issues 6-7, p.36을 참조.

17) 관련 영문번역 전문(문서 5) CWIHP Bulletin, Issues 6-7, p. 37을 참조.

18) 관련 영문번역 전문(문서 6 8) CWIHP Bulletin, Issues 6-7, p. 37을 참조.

19) 관련 영문번역 전문(문서 4) CWIHP Bulletin, Issues 6-7. P. 37을 참조.

20) 외무부, 「한국전 문서 요약」, pp. 23-24.

21) Ibid., p. 24;관련 영문번역 전문은 CWIHP Bulletin, Issue 4(Fall 1994), pp. 60-61을 참조.

22) 1949년 10월 14 북한군이 옹진반도의 은파산에 대해 대규모 군사공격을 하자 1949년 11월 3 전문에서 그로미코(Andrei A. Gromyko)외무상은 쉬티코프가 38선 상에서의 북한 측의 어떠한 군사 활동도 하지 않도록 한 공산당 중앙위 정치국의 지침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것을 이유   로 대사의 징계문제까지 거론되고 있음을 통보하였다.

23) 예프게니 바자노프ž나딸리아 바자노바, 「소련의 자료로 본 한국전쟁의 전말」(서울 : 도서출판 열림, 1998), pp. 52-53; Sergei N. Goncharov, John W. Lewis, Xue Litai, Uncertain Partners: Stalin, Mao and the Korean War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3), p.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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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부칼럼] 공산권 자료로 본 625전쟁 재평가(1) - 국가정보학 - 2010. 7. 16. 18:37

남북관계가 천안함 사건 등으로 경색되고 있으며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 한반도 상황이 어떻게 흐를지 모르는 상황에서 주변국의 대한반도정책은 복잡해지고 있는 양상이다. 2010년은 625발발 60주년, 419혁명 50주년 등으로 다양한 이해단체들이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만, 모두 과거에 얽매여 있고, 막상 대한민국의 미래를 향한 대안제시를 하지는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이 글은 송종환 명지대 북한학과 초빙교수가 2010년 6월4 자유민주연구학회가 주최한 6.25 60주년 기념 세미나에서 발제문으로 발표한 것을 소개한다. 625를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글이 아닌가 싶다.

 

<6.25 60주년기념 특집>

 

공산권 자료로 본 6·25 전쟁 재평가(1): 러시아 측이 공개한 비밀문서를 중심으로*

 

1. 문제의 제기

지난 3 26일 백령도 인근 해역에서의 천안함 폭침 원인을 조사해 온 민군합동 조사단은 5 20일 조사결과 발표에서 침몰 해역에서 수거한 어뢰의 프로펠러와 추진축 등 부품이 북한산 CHT-02D 어뢰의 설계도면과 일치함을 밝혔다. 천안함 폭침이 북한 측 소행이라는 ‘결정적 증거(스모킹 건: smoking gun)’들이 나온 것이다.

이에 대해 북한은 ‘날조극’이며 남북한 관계를 파탄시키려는 모략이라는 반응을 보이면서 “물증을 확인하기 위한 검열단을 남한 현지에 파견하겠다“고 하고 있다. 이러한 북한의 태도는 북한이 60년 전 대남 평화공세를 취하다가 6 25일 새벽에 38도 분계선을 뚫고 남침을 하고서도 지금까지 북침을 하였다고 선전을 하고 아웅산 폭탄테러 사건, 대한항공 858기 폭파사건 등 그간 자행해온 각종 도발과 테러를 부인해 온 것보다 더 질이 나쁘고 뻔뻔하다. 마치 살인을 부인하던 범인이 현장 검증까지 스스로 하겠다는 식으로 막가는 태도이다.

1950 6 25 새벽 38선에서 기습공격을 감행한 북한군이 서울 시내에 입성하기까지 단 3일이 걸렸다. 북한군은 당일 옹진반도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26일 의정부, 27일 창동, 28일 새벽 미아리 방어선을 파죽지세로 돌파했다. 그동안 개성·김포· 문산· 포천·의정부·춘천·가평 등을 손아귀에 넣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전력에서 남북한은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다. 북한의 지상군 병력은 국군의 2배였다. 10개 보병사단과 1개 전차여단, 3개 독립연대 등 182000명이었다. 국군은 8개 보병사단과 2개 독립연대 등 94000명이었다. 북한 전투장비는 남한의 3배가 넘었다. 개전 당시 북한은 200대가 넘는 전차를 보유했다. 국군은 단 한대도 없었다. 장병들은 북한 전차 소리만 들어도 도망을 가거나 두려움에 떨었다. 공군력의 경우 북한은 전투기 포함 211대가 있었지만, 아군은 연락기와 연습기 22대가 전부였다.

북한은 38도선 전역에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해 한 달여 만에 부산을 점령한다는 계획이었다. 북한 주공(主攻) 4개 사단과 1개 전차여단으로 구성된 제1군단이 맡았다. 3·4사단과 제105전차여단 예하 2개 전차연대는 의정부-서울 방향으로, 1사단과 1개 전차연대는 문산-서울 방향으로 공격했다. 나머지 6사단은 한강을 넘어 김포-영등포로 진격하게 했다.

조공(助攻) 3개 보병사단과 1개 모터사이클연대로 구성된 제2군단이 맡았다. 이 중 제2, 12사단과 모터사이클연대는 춘천-가평·홍천-수원 방향으로 진격해 서울 동측을 우회 공격, 국군 주력을 포위하도록 했다. 나머지 제5사단은 제766유격연대와 제945육전대의 지원을 받아 동해안 축선을 따라 포항 방면으로 남진하도록 했다.

국군의 전방방어 부대는 4개 사단과 1개 연대였다. 옹진반도에 보병 제17독립연대, 개성·문산에 제1사단, 의정부 북방에 제7사단, 춘천 북방에 제6사단, 동해안에 제8사단을 배치했다. 그나마 북한 남침 전날인 24 0 기해 한동안 계속했던 비상경계령이 해제됨에 따라 많은 장병이 휴가와 외박을 나가 부대에 남아 있는 병력은 절반에 불과했다. (1)

위와 같은 전쟁 초기의 전황과 이를 맞이한 한국 측의 대응, 특히 많은 장병의 휴가와 외박에 비추어 6·25 전쟁이 어느 측의 공격에서 시작되었음이 자명한데도 한국 국내에서는 북한의 북침 주장이 위험할 정도로 퍼져 있다.

이와 같은 북침 주장과 관련하여 지난 10년간 좌파정부 집권동안 주적 개념에 대하여도 김충배 전 육군사관학교 교장이 “2004 1월 육사 가()입교생 의식조사”를 한 결과 당시 250여명의 가입교생 중 무려 34%가 주적(主敵)이 ‘미국’이라고 답했고, ‘북한’이라고 답한 입교생이 33%에 머물 정도였다고 증언한 것처럼 크게 오도된 바 있다.

이렇게 학생들의 주적 개념이 오도되고 있는 것은 이명박 정부 하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2008년 6월 23 행정안전부가 “리서치&리서치”에 의뢰해 전국 중·고생 1,01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안보·안전의식 설문조사에서 ‘우리나라 안보에 가장 위협적인 국가’를 묻는 질문에 미국(28.4%)이 가장 높았으며, 다음이 일본(27.7%)이고, 북한은 24.5% 3위에 그쳐 충격을 주고 있다.

북한은 전쟁에서 죽거나 부상을 당하거나 행방불명이 된 남북한 군인, 유엔군과 중공군의 군인이 300만 명에 달하고 또 10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죽거나 부상을 당하거나 행방불명이 된  야만적인 6·25 남침 전쟁을 일으키고도 북침 주장을 계속하고 있고 한국 내부에도 북한의 주장에 동조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북침 주장은 김일성박헌영이 전쟁을 구상하고 시작할 때부터 갖고 있던 위장전술임이 북한 자료 분석을 통하여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2)

특히 1992년부터 러시아가 더 이상의 논쟁의 여지가 없을 정도의 ‘결정적 증거’들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전쟁 전후 스탈린(Joseph Vissariovich Stalin)-김일성-마오쩌둥(毛澤東) 간에 오고 간 비밀전문들을 공개함으로써 1970년대 이후 수정주의론자들이 주장해온 북침설이나 남침유도설은 더 이상 지탱되기 어려워졌고(3) 남침, 북침에 대한 논쟁도 사실상 끝난 것처럼 보인다.

다만 남아 있는 문제는 흐루시쵸프((Nikita Khrushchev)의 회고록(4), 6·25 전쟁  당시 북한 인민군 부총참모장과 소련 주재 북한 대사를 역임한 이상조의 1989년 9월 11 기자회견 등에서 강조된 “한국전쟁이 김일성의 전쟁”인가를 검증하는 일이다.

과연 한국전쟁이 김일성의 개전의지와 역사적 결단에 의하여 일어났는가를 1992년부터 러시아 측에 의하여 공개된 세 가지 종류의 한국전쟁 관련 비밀문서들(5)로 검증해보고 휴전 57년이 되어도 끝나지 않은 전쟁에서 얻을 교훈과 대책을 제시하고자 한다.(계속)

<필자 주>

* 발표문은 『국제정치논총』 제39 2(1999)에 “한국전쟁에 대한 소련의 전략적 목표에 관한 연구” 제하로 개재된 연구자의 논문 중 누구에 의하여 남침 전쟁이 발발되었는가를 6. 25 전쟁 60주년을 맞아 다시 조명하고 그 후 발굴된 자료들로 업데이트한 것이다.

1) 최용호, “미니전사, ① 전쟁발발,” 『조선일보』, 2010. 3. 8, p. A5.

2)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II(서울: 나남, 2008), p. 871.

3) 김학준, 『한국전쟁-원인·과정·휴전·영향』(서울: 박영사, 2003), 3 개정·증보판, p. 414.

4) Khrushchev Remembers, with an Introduction, Commentary and Notes by Edward Crankshaw, translated and edited by Strobe Talbott (Boston: Little, Brown and Co., 1970).

5) On the Korean War, 1950-53, and the Armistice Negotiations 제하 첫 번째 자료는 미국과 전쟁 중인 베트콩에 대한 소련의 지원문제를 중국, 월맹 측 관계관들과 협의하려는 소련 관계관들에게 배경정보로 제공 할 목적으로 1966년 소련 외무성이 한국전쟁에의 소련과 중국의 개입 관련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Kathryn Weathersby, New Findings on the Korean War : Translation and Commentary, 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 Bulletin Issue 3 (Fall 1993), Woodrow Wilson International Center for Scholars, Washington, D. C. pp. 1,14-18. 두 번째 자료는 옐친(Boris Yeltsin) 대통령이 1994 6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영삼 대통령에게 제공키 위하여 정리한 『한국전쟁 관련 러시아 외교문서』(이하 『한국전 문서요약』로 약칭)로서 1949-53년 기간 중 한국전쟁에 관한 216, 548쪽에 이른다. 세 번째 자료의 정식 명칭은 The Archive of the President, Russian Federation 이며 호칭은 APRF로서 1950. 2- 1953. 7 기간 중의 총 1, 200쪽에 이르는 러시아 대통령실 문서고 소장 문서들이다. 상기 문서들은 1993년 가을부터 Washington, D. C. 소재 Woodrow Wilson International Center for Scholars가 발간하는 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 (이하 CWIHP로 약칭) Bulletin에 시리즈로 게재 되었으며 http://www.wilsoncenter.org/cwihp  The Korean War 섹션에서 검색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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