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관계가 천안함 사건 등으로 경색되고 있으며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 한반도 상황이 어떻게 흐를지 모르는 상황에서 주변국의 대한반도정책은 복잡해지고 있는 양상이다. 2010년은 625발발 60주년, 419혁명 50주년 등으로 다양한 이해단체들이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만, 모두 과거에 얽매여 있고, 막상 대한민국의 미래를 향한 대안제시를 하지는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이 글은
<6.25 60주년기념 특집>
공산권 자료로 본 6·25 전쟁 재평가(4): 러시아 측이 공개한 비밀문서를 중심으로*
4. 스탈린, 전쟁과 휴전협상의 장기화 유도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 후 승기를 잡은 상황에서 미국과 영국이 주도하는 유엔총회 정치위원회는 10월 4일 상기 소련 측 결의안을 부결시켰으며 이어 유엔총회는 찬성 47, 반대 5, 기권 7표로 북한 패배 후 유엔주관으로 한반도에서의 통일 자주 민주국가 수립을 위한 선거 실시 등 요지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동 결의안 표결이 있는 날 워커(Walton Walker)장군의 제1기병부대의 선두는 38선을 돌파하였다.(43)
그러나 10월 19일 밤 중국군이 압록강을 도강하여 공격에 나서자 유엔군과 한국군은 다시 후퇴, 전황이 어렵게 된 상황에서 12월 유엔주재 인도, 영국, 스웨덴 대표와 리(Trygve Lie) 사무총장은 중국 대표에게 중국이 수락할 정전조건 제시를 요청하였다. 이에 대하여 주우언라이는 12월 7일 한반도에서의 모든 외국군 철수, 대만 및 대만 해협으로부터의 미군 철수, 한국문제는 한국인 스스로 해결, 중국정부 대표의 유엔 참여 및 대만정부 대표 축출, 일본과의 평화조약준비를 위한 4강국 외상회의 개최 등의 정전 조건을 스탈린에게 제시하면서 그의 의견을 문의하였다.(44)
같은 날 스탈린은 소련 공산당 정치국의 유엔주재 비신스키대사앞 훈령에서 미국이 패퇴를 거듭함에 따라 완패를 모면하고 시간을 벌기 위하여 한반도에서의 군사 활동 중지에 관한 제의를 빈번히 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주은래가 제시한 정전조건들은 적절치 않다고 답변하였다.(45) 스탈린은 같은 날 주우언라이에게 보낸 전문에서도 서울이 아직 해방되지 않은 시점이므로 중국 측이 모든 카드를 제시할 때가 아니라고 하면서 주우언라이가 미국과 유엔이 먼저 정전조건을 제시토록 하는 전략을 택할 것을 제시하였다.(46) 유엔 측이 다시
그러나 1951년 4월과 5월 중공군과 북한군의 대공세 실패는 스탈린으로 하여금 유엔군 사령부와의 휴전협상을 개시토록 압박하였다.
마오쩌둥이 6, 7월 2개월간은 중공군과 북한군이 수세적 위치에 있으므로 유엔군사령부와 협상을 개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제시해옴에 따라 스탈린은 협상개시를 위하여 필요한 조치를 취하도록 말리크대사에게 지시하였다.(51) 1951년 7월부터 1953년 7월까지 계속된 휴전협상의 초기단계에 마오쩌둥은 중국 측이 만족할 조건들을 확보할 경우 휴전협정을 체결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52) 그러나 스탈린은 미국이 휴전협정을 체결해야 할 더 급박한 필요가 있다고 하면서 중국과 북한 측은 서두르거나 협상의 조기 종결의사를 보이지 않고 계속 강경입장을 견지토록 종용하였다.(53)
교착상태에 있었던 휴전협상은 1953년 3월 스탈린 사망 후 급진전을 보게 된다. 스탈린 사후 2주 후 3월 19일 소련 각료회의는 한국전쟁을 조기 종결토록 결정을 하였는바, 동 결정은 스탈린이 한국전쟁 계속의 주요인이었으며 그가 죽은 뒤 곧 소련, 중국, 북한이 휴정협정체결을 위한 조치들을 취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54) (계속)
<필자 주>
42) Mansourov, “Stalin, Mao, Kim, and China’s Decision to Enter the Korean War, September 16-October15, 1950,”pp. 98-99.
43) Ibid., p. 101.
44) Weathersby, “New Russian Documents on the Korean War,” p. 32; 외무부,「한국전 문서요약」, p. 60; 관련 영문번역 전문(문서 47)은 CWIHP Bulletin Issues 6-7, p. 52를 참조.
45) Weathersby, “New Russian Documents on the Korean War,” p. 32; 외무부,「한국전 문서요약」, pp. 60-61; 관련 영문번역 전문(문서 48)은 CWIHP Bulletin Issues 6-7, pp. 52를 참조.
46) Weathersby, “New Russian Documents on the Korean War,” p. 34; 관련 영문번역 전문 (문서 49)은 CWIHP Bulletin Issues 6-7, pp. 52-53을 참조.
47) Weathersby, “New Russian Documents on the Korean War,” p. 34; 관련 영문번역 전문 (문서 52)은 CWIHP Bulletin Issues 6-7, pp. 54-55를 참조.
48) Weathersby, “New Russian Documents on the Korean War,” p.34; 관련 영문 번역전문 (문서65)은 CWIHP Bulletin, Issues 6-7, p. 59를 참조.
49) Chen Jian은 모택동이 한국전쟁 시 북한을 지원한 동기는 유엔군의 중국 국경 접근에 따른 안보 위협보다 국제적으로 신생 중국의 위신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Jian, China’s Road to the Korean War, pp. 211-223.
50) Kennan to Matthews, 5 June 1951, in U. S. Department of State, FRUS, 1951, Vol. VII(pt.1), pp. 507-511.
51) Weathersby, “New Russian Documents on the Korean War,” p. 35, 말리크 대사는 6월 23일 유엔 라디오 망을 통한 연설로 휴전 협상을 제의하였다.
52) Weathersby, “New Russian Documents on the Korean War,” p. 35; 관련 영문번역 전문(문서 84~88)은 CWIHP Bulletin, Issues 6-7, pp. 66-69를 참조.
53) Weathersby, “New Russian Documents on the Korean War,” p. 35; 관련 영문번역 전문(문서 95)은 CWIHP Bulletin, Issues 6-7, pp. 72를 참조.
54)Weathersby, “New Russian Documents on the Korean War,” pp. 34~35; 관련 영문번역 전문(문서 112)은 CWIHP Bulletin, Issues 6-7, pp. 80-83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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