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정국이 소용돌이 치고 있다. 최근 화폐개혁, 김정일 피격설, 6자 회담에서의 강경노선견지 등 다양한 이슈에 대해 대한민국 정부의 대응이 적절한지,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통일에 도움이 되는지 등은 누구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제이다. 최근 자유기업원에 게재된 송종환 교수님(명지대 북한학과 초빙교수)의 칼럼이 이러한 주제와 연관이 있어 소개한다. 물론 이 분의 주장이 모두 옳거나 받아들이자는 것은 아니고 학자의 의견으로 충분히 고민할 여지는 있다고 보여진다. 다음은 자유기업원에 게재된 내용이다.
III. 햇볕정책 추진 정부 재임 중 남북한 관계 평가
2000년 6월 13~15일 평양에서 있은 남북한 정상회담에서「6·15 선언」을 합의, 발표한 이후 전개된 남북한 관계 추이를 두고 이를 주도한 김대중· 노무현 전 정부 인사들은 한반도통일을 위하여 남북화해와 평화적 교류가 진행되었던 것으로 평가하고 있고, 반대 측은 양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기간 중에 있은 교류·협력 과정의 문제점들과 북한의 핵실험 등 군사적 도발로 남북한 관계가 오히려 후퇴하였다고 비판하고 있음.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은 협상상대자인 북한에 대하여 전임 박정희,노태우, 김영삼 대통령과는 다른 몇 가지 가정과 인식 및 목표에 기초하여 대북정책을 추진하였음. 1998년 2월~2008년 2월 집권한 김·노 전 대통령은 북한이 군사적 도발을 하더라도 먼저 북한을 따뜻하게 포용하면서 교류・협력을 활성화하는 것이 남북관계를 정상화하고 한반도에서 냉전구조를 해체시켜 사실상의 통일로 가는 최선의 길이며, 북한은 타도와 갈등의 대상이라기보다는 화해와 공존・공영의 대상이며, 북한 지도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판단력과 지도력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개방적이며 실용적인 인물인 동시에 남의 말을 경청할 줄알고 신사적이고 예의 바르며 유머감각이 있는 지도자로 매우 긍정적으로 인식하였음.
또한 대북 포용정책은 단기적으로는 북한 정권의 위기해소에 도움을 주지만 중‧장기적으로는 북한체제를 변화시켜 한국의 체제와 이념 속에 통합시킬 수 있고,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에 도움이 된다면 남북대화의 진전이나 관계개선 이전에 미국과 일본의 대북 관계개선이 이루어져도 무방하다는 것 등이 그러한 가정들임.
이러한 인식과 가정들에 입각하여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북한 측에 의한 수많은 도발행위와 김정일의 답방 합의 불이행에도 불구하고 국가안보에 위기를 조성하면서 화해‧협력정책을 견지해왔고 오히려 이러한 일관성을 대북정책의 업적이라고 홍보하였지만, 남남갈등을 크게 일으킨 끝에 2007년 12월 19일 있은 제17대 대통령선거에서 심판을 받았음.
1. 북한의 대남전략·통일정책과 김대중·노무현정부의 햇볕정책의 연합
북한은 김대중ㆍ노무현 정부 재임 기간 중 주한미군 철수와 국가보안법 철폐 후 수립될 남한의 공산정부와 합쳐 북한식 연방제 통일을 실현하고자 하는 대남공산화전략과 통일정책을 크게 전진시켰음.
지난 10년 동안 북한의 대남전략과 통일정책이 전진할 수 있었던 것은 기간 중 집권하였던 한국 정부가 북한이 군사적 도발을 하더라도 따뜻하게 포용하면서 일방적으로 지원하고 교류ㆍ협력을 하면 중국처럼 개혁ㆍ개방을 하고 변화할 것이라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북포용정책’과 이를 계승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평화번영정책’으로 호응하였기 때문임.
정부가 북한에 호의적 정책을 폄에 따라 한국에서는 대한민국 역사를 정의가 실패하고 기회주의가 승리한 부끄러운 역사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대한민국이 태어나지 않아야 할 나라로 매도되기도 하였음. 이런 상황에서 2005년 서울에서 개최된 남북한 공동행사에 나라의 상징인 태극기 휴대가 금지, 단속되고 백주에 광화문 네거리에 북한식 통일정책이 선전되고 전향하지 않은 북한 지지 내지 남파 간첩들을 기리는 ‘통일열사능’까지 마련되었음.
김대중ㆍ노무현 대통령 정부가 한국의 보수진영과의 이념갈등을 일으켜 가면서 북한의 요구대로 끌려갔던 남북한 관계를 두고 북한은 남한이 적화되었으므로 통일만 남았다고 자랑하였음. 이러한 자랑은 ‘반팟쇼 민주화 투쟁’과 ‘외국군 철수’를 요지로 하는 1920년대 초 레닌(Vladimir I. Lenin)의 반제국주의 통일전선전술과 ‘연방제 통일’ 주장이 북한 ‘노동당 규약’의 대남전략과 통일정책에 옮겨지고 이 내용이 한국 정부와 합의한 통일대강으로서의「6ㆍ15 남북공동선언」과 실천강령인「10ㆍ4 선언」의 제1~2항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기 때문임.
레닌의 주장들과 북한의 대남공산화전략과 연방제 통일정책이 두 선언에 반영된 것을 문헌적으로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음.
레닌의 반제국주의통일전선전술ㆍ연방제 제의, 북측의 대남전략·통일정책,
「6·15 선언」·「10·4 선언」의 문헌적 비교
o 레닌의 반제국주의통일전선전술→ 노동당 규약→ 6. 15 선언 제1항
- 1922. 12. 5 코민테른 제4차대회「동양문제에 관한 일반 테제」에서 반제국주의 통일전선전술 제시
△ 동양 식민지는 토착지배계급이 인민대중의 기본적 이익에 반하는 형식으로 외국자본과 타협하고 있기 때문에 근로대중을 제국주의와 모든 봉건 잔재와 싸우게 하는 반제국주의 통일전선을 구축
△ 구체적 방도로 민족해방과 인민민주주의혁명노선 제시
- 1956.4, 제3차 전당대회 채택 조선로동당 규약 前文
△ 조선로동당의 당면 목적은 공화국 북반부에서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와 전국적 범위에서 민족해방과 인민민주주의 혁명과업을 완수 하는데 있으며 최종목적은 온 사회의 주체사상과 공산주의사회 건설
- 1964. 2. 27, 노동당 제4기 제8차 전원회의에서 2단계 대남전략 채택
△ 제1단계 : 북한의 혁명기지 건설과 남한에 인민민주주의정권 수립(남조선혁명) - 민족해방(주한미군 철수)와 인민민주주의 혁명 완수(공산당활동 자유를 위한 국가보안법 철폐/반팟쇼 민주화)
△ 제2단계: 남한의 인민민주주의정권과 북반부와 합작하여 공산화 통일 완성
- 2000. 6. 15 남북공동선언 제1항
△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 주한미군 철수
- 2007. 10. 4 선언 제2항
△ “남북관계를 통일 지향적으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하여 각기 법률적ㆍ제도적 장치들을 정비”→국가보안법 철폐 빌미
o 레닌의 연방제 제의→북한의 연방제 제의→ 6. 15 선언 제2항
- 1920. 6. 5, 「민족 및 식민지문제에 관한 테제」에서 연방제 제의
△ “연방제는 여러 민족의 노동자가 완전한 통일로 나아가는 과도형태”
△ “연방제가 적절함은 러시아연방소비에트공화국과 다른 소비에트 공화국들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러시아 내 자치공화국과의 관계에서 증명”
△ “연방제가 완전한 통일로 나아가는 과도형태라는 점을 인식하고 군사, 경제적 동맹 등을 염두에 두면서 점점 긴밀한 연방적 결합을 지향
- 1991년 김일성 신년사에서 ‘낮은 단계 연방제’ 제시
△ “민족적 합의를 보다 쉽게 이루게 하기 위하여 잠정적으로 연방공화국의 지역적 자치정부에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하며 장차로는 중앙정부의 기능을 더욱더 높여 나가는 방향에서 연방제 통일을 점차적으로 완성하는 문제도 협의할 용의가 있다.“
△ ‘낮은 단계 연방제’: 1민족, 1국가, 2체제, 2지역자치정부들이 ‘높은 단계의 연방제’의 중앙정부가 갖는 정치, 군사, 외교권을 갖고 그 위에 민족공동의 이익에 맞게 남북관계를 통일적으로 조절하는 민족통일기구 설치
△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재야시절에 발표한 3단계 통일론(남북연합-연방-완전통일)중 군사권과 외교권을 남북의 두 정부가 갖는 남북연합단계와 형식상 공통
- 2000. 6. 15 남북공동선언 제2항
△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
2. 북한의 공산화 통일기반 구축 및 남남갈등 심화시킨「6ㆍ15 남북공동선언」
2000년 6월 13일부터 15일까지 남북한 정상들이 평양에서 만나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한 의의는 1994년 7월 8일 사망한 김일성의 조문(弔問) 문제로 북한 측이 거부해온 한국 당국과의 대화가 6년 만에 복원되고 분단 55년만에 처음으로 정상들이 만나 5개 항으로 된「6ㆍ15 남북공동선언」을 합의하고 당국 간 대화를 제도화한 것임.
동 선언은 한반도에서 냉전종식의 시작을 알리면서 새 역사를 여는 선언으로서, 남북한 간에 전쟁위험을 해소해나가고 자주와 평화의 원칙에 따라 점진적・단계적으로 통일을 추진해 나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역사적쾌거였으며 동북아의 새 시대를 여는 여명(dawn)이라고 평가할 만 하였음.
그러나 「6.15 남북공동선언」은 남북한 쌍방이 1989년 2월부터 1992년 2월까지 거의 3년간 예비회담과 총리회담을 거쳐 합의, 발표한 「남북기본합의서」를 이행하고 준수하려는 노력을 등한시하고 이를 사문화시킴으로써 쌍방의 정권교체 시 전(前) 정부가 합의하여 발효시킨 사항들을 무시 할 수 있는 전례를 남겼음.
동 선언은 남북한 간의 대화와 통일을 위한 이정표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항목을 결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 선언 제1항 자주적 원칙과 제2항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와 남측의 연합제와의 공통점을 인정한 통일방안을 둘러싼 남북한 간의 해석상의 차이로 이를 실천에 옮길 수 없는 중대한 문제점을 안고 있음.
첫째, 동 선언에는 기존의 중요 남북한 간의 합의에 포함되었던 군사적 긴장완화와 한반도의 평화구축에 관한 항목이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음.
즉, 「7.4 남북공동성명」의 7개항 중 제2항은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무장도발을 하지 않으며, 불의의 군사적 충돌사건을 방지하기 위한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기로 합의하였다”라고 규정하고, 「남북기본합의서」의 제2장 제9조부터 제14조는 무력 불사용, 분쟁의 평화적 해결 및 우발적 무력충돌 방지, 불가침 경계선 및 구역 설정, 군사직통전화의 설치운영, 이를 위한 협의이행 기구 등을 합의하였으나, 「6.15 남북공동선언」은 군사적 긴장완화에 관한 합의를 결여하고 있음.
둘째, 「6.15 남북공동선언」 제1항 자주원칙에 관하여 해석상의 차이로 이행할 수 없는 문제점이 있음.
2000년 6월 15일 서울로 귀환 후 국무회의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과거에는 자주를 외세를 배격하는 의미로 해석되었는데, 이것은 이제 그렇게 좁게 볼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변국과 잘 지내며 우리 문제를 남북이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간다”는 의미라고 하면서 자주원칙과 국제협력이 모순되지 않는다고 설명하였음.
이어서 김 대통령은 김정일 위원장과의 정상회담에서 “소련 붕괴 후 NATO가 그대로 남아 유럽의 안정을 이루듯 한반도 긴장완화, 동북아 세력균형을 위해서도 미군주둔은 필요하다”는 요지로 설득하자 김 위원장은 “휴전선의 비상사태 때 주한미군이 조정자 역할을 해줄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답변하였다고 덧붙여 설명하였음. 한국 정부 관계자는 더 나아가 동 선언의 제1항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공동선언은 북한 측이 미군의 존재를 인정하는 바탕 위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강조하였음.
그러나 북한 측은 동 선언 발표 후 주한미군 철수에 대한 기존의 입장을 추호도 변경하지 않았으며 오늘날까지 그대로 견지하고 있음. 북한 측은 동 선언 발표 다음 날인 6월 16일 평양방송을 통하여 “미국은 더 이상 자주적 평화통일을 방해하지 말아야 하며 미군의 강점을 끝낼 용단을 내려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2001년 8월 4일 러시아 푸틴(Putin) 대통령과 합의한「북·러 모스크바선언」의 7장에서 “주한미군 철수가 한반도와 동북 아시아의 평화와 안전보장에 미룰 수 없는 초미의 문제”라는 입장을 발표하였음.
심지어 2002년 10월 초 북한 측의 우라늄 농축 발언으로 미‧북한 간 긴장이 조성된 제2의 북한 핵 위기 이후 북한 측은 주한미군 철수 주장을 넘어 남한이 북한과 힘을 합쳐 미국에 대항하여야 한다는 ‘북한식 민족공조론’으로 발전시켜 이를 거듭 주장하였음.
셋째,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합의한 동선언 제2항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통일정책의 수립, 추진”을 규정한 대한민국 헌법 제 4조를 위반하고, 현실적으로 남북한의 정치, 경제 체제가 다르고 역시 남북한 간의 해석 차이로 이행할 수가 없음.
2000년 10월 9일 김 대통령은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와의 영수회담에서 “연방제는 외교, 군사권을 중앙정부에 일임하는 것인데 북한 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북한 측이 연방제를 포기한 것으로 본다”고 말하고, 당시 통일부장관도 11월 6일 통일부에 대한 국정감사장에서 야당의원 질의에 대하여 “북한 스스로 연방제가 실효성이 없다고 보고 사실상 포기한 것”이라고 답변하였음.
그러나 북한 측은 연방제를 계속 주장하면서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에 와서 김일성의 연방제를 합의하였다고 해석하였음. 2000년 10월 6일 북한의 주요 요인들이 참석한 김일성의 ‘고려민주련방공화국 창립방안 제시 20돌 기념 평양시 보고회’에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장 안경호는 김일성의 “뜻이고 유훈인 련방국가 창립방안을 기어이 실현해 나갈 굳은 결의를 다진다”고 말하였음.
동년 10월 9일 김일성의 ‘고려연방공화국 창립방안 제시 20주년’을 기념하여 『로동신문』에 실은 글에서 북한 측은 ‘련방제 통일방안은 가장 정당하고 현실적인 통일방도’임을 강조하고 ‘낮은 단계의 연방제’가 연방제 통일로 가기 위한 과도적 조치임을 밝혔음.
넷째, 「6. 15 남북공동선언」은 태생적 문제가 있음. 2003년 6월 현대그룹 정몽헌 회장이 동 정상회담 성사를 위하여 김대중 정부의 인지 하에 현대그룹이 정상회담 개최 전에 현금 4억 5천만 달러와 평양체육관 건설 자재, 트럭 등 5천만 달러를 비밀리에 제공한 것을 밝힘으로써 그동안 김대중 정부 측이 강력히 부정해온 「6. 15 남북공동선언」의 태생에 대한 의혹이 확인된 것임.
위에서 지적한 문제들보다 더 우려되는 것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9년 8월 타계할 때까지 동 선언 제 1~2항에 대한 북한의 상반된 주장을 명백히 반박하거나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고 침묵을 지킴으로써 한국 내부에서는 북한의 대남공산화전략과 연방제 통일정책 주장이 급격하게 확산되게 한 것임.
마지막으로「6ㆍ15 선언」이후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집권기간 중인 2000년부터 2008년 초까지 있은 제3항 이산가족·친척 방문단 교환과 비전향장기수 문제 등 인도적 문제, 제4항 경제 및 경제, 사회, 문화 등 제반 분야의 교류와 협력, 제5항 당국 간 대화 실태는 평가하기가 수치스러울 정도로 일방적임.
제3항 인도적 문제는 한국 측이 북송을 희망하는 비전향장기수 63명을 전원 송환하였으나, 이산가족의 만남은 북한 측의 요구로 종전의 서울·평양 동시 교환방문에서 아예 금강산으로 고착시켰다가 일방적으로 중단되었음.
제4항 경제 및 경제, 사회, 문화 등 제반 분야의 교류와 협력은 거의 일방적 지원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 이명박 정부 취임 후 밝혀진 2000~2008년 초 기간의 대북지원 액수는 각종 경협 경협과 사회·문화교류 사업을 하면서 현금 29억 9,998만 달러, 쌀, 비료 등 현물 44억 달러로 모두 69억 5,950만 달러에 달하고, 비정부 차원의 지원은 7억 3,148만 달러임. 이 통계에는 한국 측이 각종 교류·협력과 이산가족 상봉을 하면서
정부승인 없이 준 ‘뒷돈’은 포함되지 않음.
남북한 경제협력 실태도 실질교역수지 적자구조의 정착, 경제협력 성격의 교역비중 증대, 1차 산품 위주의 교역, 경제특구 이외지역에서는 투자부진이라는 특징이 있으며, 개성공단은 남북경협의 장점만 설명하면서 단점을 은폐하였음. 금강산관광은 북한 주민과의 접촉이 완전히 배제된 ‘울타리 관광’이었고 일방적 지원과 함께 ‘일회성 전시사업’이나 ‘행사를 위한 행사’로 진행된 각종 사회문화교류는 외형적으로 괄목하게 증가하였으나 북한 측이 대남통일전선전술 차원에서 대남공작기관이 주도하여 진정한 의미의 남북한 간 민간교류는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햇볕정책을 통한 북한 개혁·개방과는 무관한 것이었음.
제5항 당국 간 대화도 북한이 원하는 경제 지원적 성격의 대화는 진행되고 그들이 원하지 않는 군사적 긴장완화와 평화정착에 관한 대화는 제대로 시작도 하지 않았으며, 동 선언의 부속조항에 명시되어 있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적절한 시기 답방은 논의되지도 않았음.
3. 현실 무시하고 명분 없는 무모한「10·4 선언」
제17대 대통령 선거일이 2개월도 남지 않은 2007년 10월 2일부터 4일까지 노무현 대통령은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가진 정상회담에서 10월 4일 8개항으로 된「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 이른바「10·4 선언」을 합의, 발표하였음.
통일, 평화, 경제지원 등 3대 강령과 19개 이행공약을 담은 동 선언을 추진한 노무현 정부와 노 정부의 영향 하에 있었던 학자들은 찬사 일변도의 해설과 논평을 하고, 후속조치를 논의하기 위한 남북한 총리 간 대화가 2007년 11월 14일부터 16일까지 서울에서 개최되었지만, 이 선언은 현실을 무시하고 명분도 없었기 때문에 발표 그 날로 끝날 운명이었음. 연구자가 2007년 10월 9일자『조선일보』에 기고한 시론 전문을 요약하
여 동 선언의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함.
‘현실 무시’의 첫째는 북한이 주한미군 철수와 ‘공산주의로의 높은 단계 연방제 통일’을 한국 정부와 합의했다고 끈질기게 주장하는 ‘6·15 남북공동선언’을 적극 구현하고 이를 기념하는 방안을 강구하기로 한 것임.
둘째는 앞으로 북한이 국가보안법 철폐를 주장할 근거가 될 “남북관계를 통일 지향적으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하여 각기 법률적·제도적 장치들을 정비해 나기로 하였다”라는 조항 합의임. 결국 북한은 이 문서의 제1~2항에서 대남 공산화 전략과 통일정책인 자주(미군철수), 민주(공산당 활동 자유화를 위한 국가보안법 철폐), 통일(북한식 연방제) 방향을 확인하는 개가를 올렸음.
셋째는 10월 3일자 베이징 합의가 북측의 기존 핵무기, 핵 물질과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이 연내 불능화와 신고 대상에서 제외되었음에도 김정일의 핵 폐기 의사의 진정성을 확인하지 않은 것임.
넷째는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평화 보장문제를 긴밀히 협력하기로 합의하면서도 남북한 국방장관들이 11월 중 평양에서 서해 평화협력지대와 각종 협력 사업에 대한 군사적 보장 장치만을 논의하기로 한 것임.
다섯째 공동어로수역 설정 등 서해평화협력지대 합의는 북방한계선을 사실상 남쪽으로 끌어내림으로써 영해 포기, 서해 5도 어민의 생존터전 축소는 물론, 수도권에 미치는 안보 위협을 무시한 것임.
여섯째는 개성공단 확대와 해주경제특구 건설 합의로 개성공단 진출기업의 81%가 적자 상태인 현실과 쉽게 개선될 수 없는 북한 제도를 외면한 것임.
이번 문서는 이행을 위해 실질적인 부담을 짊어지게 될 한국 국민을 설득할 최소한의 명분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음.
첫째, 북한의 개혁·개방을 고려하지 않고 교류·협력과 지원을 한다면 그것은 북한 체제의 질적 변화는커녕 체제강화만을 초래하게 되는 ‘퍼주기’가 될 것임.
둘째, 북한에 생존하여 있는 국군포로와 납북 어민의 안위에 대하여 한마디도 못하고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북한 주민에 대한 인권문제도 제기하지 않은 것 역시 국민의 바람을 저버린 것임.
셋째, 실질 임기가 두 달여밖에 남지 않은 대통령이 각종 남북경협 사업의 소요 예산이 얼마 들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남북관계 발전을 위해 정상들이 수시로 만나 현안을 협의하기로 한 것은 희극적 수준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대표하는 대통령이 ‘인민주권’과 ‘인민이 위대하다’는 글로 노동자 계급에 의한 공산당 독재를 찬양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임. 만일 대통령의 진심이 이러하다면 만경대 혁명정신을 이어받자는 친북교수의 발언은 처벌할 수 없을 것임.
남북한 민족 모두가 안전하고, 자유롭게, 풍요롭게 잘살면서 세계평화와 인권을 고양하는 ‘올바른 통일’로 나아가기 위한 대북정책을 추진해 나가려면 한국 정부가 현실 무시, 명분 상실, 이행 불능과 같은 총체적 문제를 안고 있는 금번 문서와 같은 합의를 북한 측과 다시는 하지 않아야 함.
2008년 이명박 정부의 통일부가「10ㆍ4 선언」합의사항 중 북한에 약속한 경제 지원을 이행하기 위해 필요한 예산이 14조 3천억 정도라고 추산하였으나, 2007년「10ㆍ4 선언」합의를 전후하여 노무현 정부 재임 시 산업은행이 약 60조,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이 약 116조로 추산한 것이 오히려 진실에 가까운 것으로 보임.
그러나 그 액수가 몇 조가 되든 노무현 정부의 가장 중요한 통일정책 성과라고 할 수 있는 남북관계발전법률 재21조 3항에 의하면, 앞에서 추산한 정도의 예산이 소요되는 대북 사업의 경우에는 반드시 국회의 동의를 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이명박 정부가「10ㆍ4 선언」의 경제 지원 관련합의를 이행하려고 해도 이행할 수 없는 문제점이 있음.(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