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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진규 국가정보학, '국가정보학-역사와 혁신' 국가 정보기관·군무원 시험대비 필독서 안착(2)


 

입력시간 : 2015-10-21 (수) 11:36

 

기자명 : 강서인 






 저자인 민진규 국가정보전략연구소 소장은 국가정보학을 집필하면서 글로벌 시대를 맞아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용어를 최대한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한국인의 관점이 아니라 세계 각국의 관점에서 역사, 문화, 정체성을 보려고 노력해왔다.


'국가정보학-역사와 혁신' '민진규 국가정보학'에는 급변하는 21세기 국제질서에 한국이 잘 대응할 수 있도록 즉 경제정보활동, 사이버범죄, 국제범죄, 테러, 정보전쟁, 국가위기관리 등 각종 현안이 상세히 소개됐다.
 
이러한 이슈들은 그동안 국가정보기관이 중요하지 않다거나 임무 범위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푸대접을 받았다. 학자들 역시 자료가 부족하거나 개념을 제대로 정의하지 않아 국가 안보를 위한 심도 있는 체계 정리가 부족한 상황.
 
민진규 소장은 군 정보기관에서 정보분석관으로 근무했으며, 군 제대 이후 약 20년간 국가정보기관에 관해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한국과 북한의 정보기관뿐만 아니라 미국, 러시아, 중국,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 이스라엘 등 정보기관의 역사, 정보활동의 특징, 미래전망과 현안 이슈 등을 연구하기 위해 다양한 국내외 자료를 활용했다. 민 소장은 특히 국가정보기관의 비밀 적인 속성으로 인해 국내 자료가 일천한 제약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해외자료를 입수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방대한 자료를 연구하기 위해 영어, 중국어, 일본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러시아어, 아랍어, 힌두어, 히브리어, 이탈리아어, 그리스어 등 다양한 외국어에 대한 체계를 연구했고, 덕분에 자연스럽게 다수의 외국어를 해독할 수 있게 됐다. 언어학자들이 언어에 대한 체계를 연구해 수십 개의 언어를 이해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따라서 이 책이 대부분 번역된 자료나 일부 한정된 소수의 언어로 연구하고 있는 학자들이 집필한 책들과 차별화된다는 평을 받고 있는 이유로 보인다.
 
한편 민진규 소장은 "해외에 나간다고 해서 외국 정보기관이 관련 자료를 흔쾌히 제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인터넷에서 각국 정부의 보도자료, 공개자료, 언론보도, 전문학술잡지 등을 검색해 확보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됐다"며 "인터넷이 '정보의 바다'라고 불리지만 가치 있는 정보를 판별할 수 있는 직관력과 다양한 언어로 된 자료를 이해할 수 있는 언어능력이 없다면 인터넷에 있는 정보를 제대로 활용할 수 없다. 2000년대 들어 각국 정부가 정보공개제도를 활용해 많은 정보를 공개하고 있는 것도 공개정보의 질을 높이게 됐다"고 밝혔다.
 
실제 세계 최고 정보기관이라고 일컫는 미국 CIA도 공개자료를 통해 많은 정보를 획득하고 있다. 정확한 비율을 공개하지는 않지만, 공개정보활동으로 수집한 정보가 비밀활동으로 수집한 정보보다 더 많다는 것은 확실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선진국 정보기관은 외부 민간전문가에게 공개정보를 수집하는 업무를 아웃소싱하고 있으며, 국내 정보기관도 이러한 추세를 따를 것으로 판단된다. 국가정보기관이 공개적으로 정보를 수집할 경우 대상국과 외교마찰이 발생할 수 있고, 순환보직을 하는 공무원 체계상 특정 분야에 대한 전문가를 양성하기 어렵기 때문.


- 계속 - 



[출처:코리아뉴스타임] 



벌써2010년도 저물어 간다. 올 초부터 국정원시험을 준비한 수험생 중에는 서류전형에서 떨어진 수험생도 있고, 서류전형은 합격하였지만 필기시험에서 떨어진 수험생도 있고, 필기시험까지 통과하였지만 면접에서 떨어진 수험생도 있을 것이다. 올해 떨어진 수험생 중에는 내년에는 기필코 합격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다시 공부를 시작하는 수험생도 있을 것이다. 또는 지금부터 시작해서 내년도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도 있을 것이다. 국정원시험은 지원자도 많지만 높은 실력을 요구한다. 내년도8월에 있을 예정인7급 시험까지는9개월 정도밖에 남지 않아 시간이 충분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내년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이 어떤 전략을 가져야 하는지 알아보자.

첫째 2010년 시험이 쉬웠다고2011년 시험도 쉬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시험이 쉽다고 공부가 부족한 수험생도 합격할 수 있는 것은 더욱 아니다. 시험이 쉬워져 변별력이 떨어지면 오히려 불리한 경우가 많다. 문제를 쉽게 느끼는 수험생이 많으면 오히려 실력차이가 더욱 날 수도 있다. 문제가 쉽다고 경쟁률이 낮아지는 것도 아니다. 시험은 시험이다. 쉬워도 합격하는 수험생이 있고, 어려워도 합격하는 수험생이 있다. 많이 맞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소한 것이라도 틀리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 꼼꼼하게 관련 과목의 교재를 공부해야 한다. 여러 교재를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많은 수험생이 추천하는 하나의 교재를 가지고 여러 번 보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된다.

둘째 교재를 통한 시험준비도 중요하지만 평소에 국가정보기관과 관련된 시사도 관심을 가지고 봐야 한다. 북한 김정은3세 세습, 전 북한 노동당 비서 황장엽의 사망, 리비아 외교관 추방사태 등 현안이슈에 대해 심도 깊은 공부가 필요하다. 교재는 이미 지나간 사실을 기록한 것에 불과하므로 본인이 별도의 노력을 하지 않으면 시사상식을 따라 잡을 수 없다. 평소에 신문이나 방송의 관련 기사도 챙겨서 봐야 한다. 평소에 수험준비를 하느라 신문 등을 보지 못한다면 인터넷 자료라도 챙겨서 봐야 한다. 인터넷에 가면 모든 자료가 나와 있으므로1주일에 한번이나 한 달에 한번이라도 몇 시간 할애해서 챙기도록 한다. 키워드 검색을 하면 관련 뉴스나 자료가 전부 나오므로 어렵지 않다.

셋째 의외로 서류전형에서 떨어지는 수험생도 많으므로 자격요건을 잘 갖추도록 한다. 서류전형에서 떨어지는 것은 수험생의 기본자세가 안되어 있는 것이다. 대학학점, 영어성적, 각종 자격증은 본인이 얼마든지 챙길 수 있는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매년 서류전형에서 떨어지는 수험생이 줄어들지 않는다. 자격요건도 갖추지 않고 원서를 내는 것 자체가 문제이다. 국정원시험에 원서를 넣는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지 모르지만, 정말 철없는 짓이다. 어차피 시험을 준비하면 최소한 서류전형은 통과할 수 있어야 한다. 필기시험을 열심히 준비하다가 정작 서류전형에 떨어져 시험장에도 못 가는 수험생을 보면 안타깝다. 중요한 것은 기본을 잘 갖추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자격증도 하루아침에 바로 딸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지금부터 준비하도록 한다.

위 세가지 사항을 잘 유념해 남은9개월 동안 수험준비를 잘 하기 바란다. 인터넷이나 주변의 잘못된 정보에 의존하지 말고 기본기를 잘 갖추며 준비를 하면 누구나 합격할 수 있다. 시험은 아무리 어려워도 합격하는 사람이 있으므로 중요한 것은 실력이다. 어떻게 실력을 쌓을 것인지부터 먼저 고민을 해라. 수험정보도 중요하지만 실력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다. 21세기 글로벌 경쟁에서 대한민국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국가정보기관에 우수한 인재가 많이 몰려야 한다. 우수한 인재란 정보와 보안감각을 지니고 있고, 자기분야의 전문가로서 글로벌 역량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국정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신이 이러한 요건을 갖추었는지 평가하고, 부족한 부문을 찾아서 채우는 노력을 해야 한다. 모든 노력이 전부 수험준비과정에 포함될 수 있다고 본다.



남북관계가 천안함 사건 등으로 경색되고 있으며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 한반도 상황이 어떻게 흐를지 모르는 상황에서 주변국의 대한반도정책은 복잡해지고 있는 양상이다. 2010년은 625발발 60주년, 419혁명 50주년 등으로 다양한 이해단체들이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만, 모두 과거에 얽매여 있고, 막상 대한민국의 미래를 향한 대안제시를 하지는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이 글은 송종환 명지대 북한학과 초빙교수가 2010년 6월4 자유민주연구학회가 주최한 6.25 60주년 기념 세미나에서 발제문으로 발표한 것을 소개한다. 625를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글이 아닌가 싶다.

 

<6.25 60주년기념 특집>

 

공산권 자료로 본 6·25 전쟁 재평가(5): 러시아 측이 공개한 비밀문서를 중심으로*

5. 한국 전쟁에 대한 스탈린의 전략적 목표

스탈린이 계획, 감독하고 김일성과 마오쩌둥이 주연과 조연을 맡은 한국전쟁을 일으킨 소련의 전략적 의도에 대하여 학자들에 따라 많은 견해들이 나누어져 있다. 또한 한국전쟁의 원인과 관련하여 ‘김일성의 전쟁,’ 소련의 공산주의 팽창 기도 및 스탈린 자신이 언급한 1949년 기간 중의 국제환경의 변화와 한반도가 미국의 방위선 밖에 있다고 발표한 에치슨 국무장관의 선언들이 제기되어 왔다.

첫째, 한국전쟁이 김일성의 개전 의지와 역사적 결단에 의하여 일어났기 때문에 ‘김일성의 전쟁’이라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은 것 같다. 한국 전쟁의 개시부터 휴전에 이르기까지의 동향을 구 소련 - 북한 - 중국 간에 있은 비밀전문들을 일자별로 분석하여 본 결과, 김일성 1949 3, 8, 9월 등 그 해의 거의 전 기간에 걸쳐 스탈린에게 남침 승인을 거듭 요청하였으나 이 기간에는 한국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김일성의 남침의사만으로 한국전쟁 원인을 설명하는 데는 한계점이 있다.

또한 그 당시 냉전질서 하의 국제관계 특히 북한 체제가 대부분의 동구 공산국가들의 체제와 같이 스탈린의 의도대로 소련의 치밀한 계획과 지원에 의하여 수립(55)되었음에 비추어 김일성이 한국전쟁 개시를 역사적으로 결정하고 주도했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다.

울람(Adam Ulam)교수가 “스탈린은 이미 남침계획을 갖고 있었다. 다만 그는 그가 승인을 하고 도움을 줄 가장 적절한 시기를 기다렸을 뿐이다. ..달리기 경주에서 경주가 출발을 위하여 구부려 기다리고 있는 선수에 의하여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심판이 출발신호를 함으로써 시작되는 것처럼 한국전쟁은 스탈린이 승인을 함으로써 시작되었다”(56)고 지적한 것은 공산진영 내 스탈린의 위치로 인해 스탈린과 김일성간의 관계가 주종관계 이었음에 비추어 매우 적절한 평가로 판단된다.

둘째,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즉각적으로 한국 구원을 위하여 파병을 한 트루먼 행정부는 한국전쟁을 동서냉전의 테두리에서 소련공산주의 팽창의 일환으로 보았고 이제까지의 전통적 견해가 되고 있다.

성신여대 김영호 교수는 한국전쟁의 원인을 스탈린의 롤백전략(rollback strategy)에서 찿는다. 이 롤백이론은 스탈린이 냉전 개시 이후 최초로 중국공산혁명 이후 공산세력 팽창에 유리하게 전개되는 전략적 상황과 북한 지도부의 무력통일론을 이용하여 자신의 세계 전략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북한군을 이용하여 미국의 봉쇄선을 대담하게 넘어서 한반도 전체를 소련의 영향권에 편입시키기 위하여 한국전쟁을 일으켰다고 주장한다. 스탈린은 이 롤백전략에 의하여 만일 미국이 만주로 침략해올 경우 중·소 동맹조약을 발동하여 미국을 광활한 황무지인 만주로 끌어들여 미국을 약화시키고 냉전대결에서 결정적 승기를 잡고자 하였다는 것이다.(57)

미 행정부는 1949 7월 주한미군 철수 후 8월 소련의 원폭 실험 성공, 10월 중국공산 정부의 수립 등 국제환경 변화에 대처하기 위하여 1950 1 NSC 68과 같은 대소

전략 을 검토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배경에서 그 동안 전략적으로 중요하지 않다고 평가 하였던 한반도에서 1950 6월 북한군의 남침이 있자 즉각적인 지원에 나섰다. 미국은 북한의 남침이 서독, 이란 등 다음 목표에 대한 공산진영 측의 공격으로 이어지는 소련의 세계적화전략의 일환으로 보았다. (58)

따라서 1949년 기간 중의 국제정세 변화는 스탈린이 한국전쟁을 일으키는 계기도 되고 미국이 공산진영의 팽창을 저지하는 차원에서 그 동안 전략적으로 경시해왔던 한국에 대하여 즉각적 지원을 제공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마샬 슐만(Marshall Shulman)은 “소련은 중국이 소련의  참전여부와 상관없이 한국전쟁 참전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에 북한에서의 지배적 위치를 잃을 것을 우려하여 김일성의 한국전쟁 개시 간청을 승인하였다”고 주장하였으며(59) 울람교수는 “스탈린이 남한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하기 위하여 한국전쟁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한국전쟁이 일어나면 마오쩌둥이 중국대륙에서 새로운 내전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여 소련의 지원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을 예견하고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소련의 후견적 지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할 목적으로 소련 측이 일으킨 전쟁”이라고 주장하였다.(60) 상기 두 학자는 스탈린이 한국전쟁을 일으킨 동기를 공산주의의 팽창에서 보다 그의 대중국 관계에서 찾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셋째, 스탈린이 에치슨 국무장관의 선언을 보고 남침을 승인하였다는 주장도 평소 스탈린의 미국관에 비추어 타당하지 않게 보인다. 스탈린은 한국전쟁 개시 시기를 고려할 때 미국이 개입할 것을 전제로 하였다. 김일성 1950 4월 모스크바 방문 시 남침 하더라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을 개진하였으나 스탈린은 한국과 미국이 정신을 차릴 시간을 주지 않아야 한다고 하면서 전쟁이 장기화되면 미군이 응당 개입할 것으로 판단하였다.(61) 미국의 군사적 개입 가능성에 대한 스탈린의 판단은 불가닌 (Bulganin) 국방상과 그로미코(Andrei A. Gromyko) 외무상이 1949 9월 한반도문제에 관한 소련공산당 정치국 결의안을 심의하기 위하여 만든 초안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62)

스탈린이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았지만 한국전쟁을 승인한 진정한 전략적목표는 그의 중국관(63)에 입각한 세계전략과 관련이 있다. 스탈린은 세계 제2차 대전 기간 중 2천만여명의 소련인민의 사상자를 내었고 전후 경제 재건을 위하여 북한이 통일을 위하여 남침을 하더라도 미국과의  대결이 예상되는 한국전쟁에 직접 개입할 수 없다는 구구한 변명을 내세워 한국전쟁 개시 시기 결정 때부터 중국을 개입시키고 북한 붕괴 상황에 이르자 북한을 포기한다는 마지막 카드를 제시하여 중국의 참전 지원을 극적으로 유도하였다.     스탈린이 중공군이 한반도의 전장에서 현대전을 연구할 것을 권고하면서 휴전협상을 장기화시켜 중국 측의 희생을 강요한 것을 보면 스탈린은 중국공산당이 그의 예상 밖으로 조기에 공산혁명을 달성하자 중국공산당 창당이후 견지해온 마오쩌둥에 대한 의구심(64)과 아시아에서의 제2티토 등장 가능성에 대한 우려에서 중국을 약화 하려는 의도로 한국전쟁을 일으켜 중국을 개입시킨 것으로 판단된다.

한국전쟁 발발 후 북경주재 영국 영사 브라이언(Brian)이 “조선전쟁은 중국이 대만을 점령하고 강대국이 되는 것을 방지하려는 특수한 목적 하에 소련에 의해 개시된 것”이 라고 지적한 것(65)은 상기와 같은 스탈린의 중국 약화 의도를 제대로 파악, 관찰한 것이다.

또한 스탈린은 한국전에 중국을 개입시킴으로써 중국과 서방과의 연계를 차단하고 중국을 확실히 소련의 영향권 하에 묶어두려는 것도 고려하였을 것이다.(66) 스탈린이 한국전쟁 개시 승인을 하면서 중국을 개입시킨 것은 1949 12월 마오쩌둥이 새로운 중·소 동맹조약을 체결하기 위하여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여러 가지 이유로 동 조약 체결에 긍정적 반응을 보이지 않던 스탈린이 1950 1월 영국과 인도가 중국을 승인하자 태도를 바꾸어 조약체결에 응한 것처럼 중국의 대서방 관계개선을 경계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한국전쟁을 일으킨 스탈린의 전략적 의도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949년 스탈린은 군사적으로 미국이 소련보다 월등 강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세계 제2차 대전 후 대미 관계가 급속히 악화되어 가고 있음에도 만주에 비해 부차적 가치 밖에 없는 한반도에서는 미국과 군사적으로 대결할 의사가 추호도 없었으며 북반부의 소비에트화만을 적극 추진하였다.

그러나 스탈린은 자신이 원하던 것과는 달리 마오쩌둥이 1949년 후반 중국 대륙을 석권, 공산혁명을 달성하자 1950년 초 그 동안 반대해왔던 북한 측의 한국전쟁 개시 요청을 승인하였다. 그는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전쟁 물자를 지원하고 다수의 군사 고문단을 보내어 철저한 전쟁 감독을 하면서도 미국과의 직접 대결을 끝까지 회피하면서 중국을 한국전쟁에 필사적으로 끌어 들였다. 스탈린은 북한이 남침할 경우 미국이 개입할 것으로 보고 한반도에서 중국과 미국을 싸우게 하여 양국을 모두 약화시키려는 세계 전략적 차원에서 한국전쟁을 일으켰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부차적으로 한국전쟁을 일으켜 중국의 대서방 관계 개선을 저지하려 하였다.

그러므로 중국공산혁명이 성취되지 않았다면 스탈린은 북한지도부가 무력남침을 주장하더라도 이를 승인하지 않았을 것이며 최소한 그 시점에서는 한국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계속)

 

<필자 주>

55) 1940년대에 스탈린의 후계자로 여겨져 왔던 쥐타노프(Zhdanov) 레닌그라드 당 위원회 제 1서기의 충직한 부하로서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하여 1945 4월 이래 연해주 군관구 군사평의회 위원, 1948- 1951년 북한주재 소련 특명전권대사를 역임하면서 소련의 한반도정책을 입안하고 실천에 옮기는 과정에 주도적 역할을 한 쉬티코프의 「일기」를 검토해보면, 소련 군정이 모든 정책결정의 주도자 및 집행자로 등장하여 북한을 지도하며 계획을 관철시켜 나가는 정치 메커니즘을 잘 보여준다. 쉬티코프를 정점으로 하는 북한주재 소련군 사령부는 정책결정 과정에서 주도적이면서도 최종적인 권력을 행사하였다. 세계 2차 대전 종료 후 북한의 정치드라마는 쉬티코프의 책상에서 기획되어 연해주 군관구와 북한주재 소련군 사령부 지도자들과의 회의에서 확립되면 모스크바의 재가를 얻은 후 북한 지도부를 독려하여 기획자의 의도에 충실한 북한인 출연자를 선발하고 기획자의 최종적 결재를 맡아 진행되는 것이었다. 소련의 군정에 대하여는 김학준, 『강대국권력정치 아래서의 한반도 분할과 소련의 군정개시: 1963~1946 1월』(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8), 북한의 역사 제1; 김학준, 『미소냉전과 소련군정 아래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946 1~1948 9월』(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8), 북한의 역사 제2권을 참조; 쉬티코프의 생애에 대하여는 Hyun-su Jeon with Gyoo Khang, The Shtykov Diaries : New Evidence on Soviet Policy in Korea, CWIHP Bulletin, Issues 6-7(Winter1995/1996), Washington, D. C.: Woodrow Wilson International Center for Scholars, pp. 69, 92-93을 참조; 쉬티코프가 추진한 한반도정책의 상세 내용에 대하여는 전현수, “「쉬띄꼬프 일기」가 말하는 북한정권의 성립과정,” 「역사비평」, 30(1995 가을), pp. 135-162를 참조.

56) Adam Ulam, Letters : Stalin, Kim and Korean War Origins, CWIHP Bulletin, Issue 4 (Fall 1994), p. 21.

57) 김영호, “한국전쟁 원인의 국제정치적 재해석 : 스탈린의 롤백이론,” 「한국정치학회보」, 31집 제3(1997 가을), p. 192; 스탈린의 롤백전략에 대한 김영호 교수의 상세 설명은 김영호, 『한국전쟁의 기원과 전개과정』(서울: 성신여자대학교 출판부, 2006)을 참조.

 

58) Weathersby, Soviet Aims in Korea and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1945-1950, pp. 6-7. NSC 68의 배경과 상세 내용에 대하여는 최광녕, “한국전쟁의 원인,하영선 편 『한국전쟁의 새로운 접근 : 전통주의와 수정주의를 넘어서』(서울 : 나남, 1990), pp.276-295를 참조.

59) Marshall Shulman, Stalins Foreign Policy Reappraised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1963), p. 141.

60) Adam Ulam, The Communists : The Story of Power and Lost Illusions: 1948-1991 (New York and Toronto: Charles Scribners Sons, 1992), pp. 81-82.

61)  예프게니 바자노프ž나딸리아 바자노바,「소련의 자료로 본 한국전쟁의 전말」, pp. 53-54.

62)  Ibid., p. 43.

63) 스탈린은 1926년부터 중국국민당을 혁명주력세력으로 평가하면서 마오쩌둥의 중국공산혁명을 오히려 방해하고 분단까지 기도하였으며 1945 2월 이후 세계 제2차 대전 종전 협의 과정에 대련, 여순, 동청철도와 남만철도 등 만주에 대한 특수지위를 확보하였다. 상세 설명은 송종환(1999), pp.193- 198을 참조.

64) 모택동은 1956년 3월 31 중국 주재 유딘 대사와의 면담 시 스탈린이 중국공산당 창당이후 국민당 정부를 지지하면서 중국공산혁명을 방해한 행위를 각종 사례를 들어가면서 비난하였다. 유딘 대사의 본부 보고 전문의 영문역은 CWIHP Bulletin, Issues 6-7, pp. 164-167을 참조.

65) 예프게니 바자노프ž나딸리아 바자노바,「소련의 자료로 본 한국전쟁의 전말」, p. 107.

66) Goncharov et al., Uncertain Partners: Stalin, Mao and the Korean War, p.139,143; Weathersby,Soviet Aims in Korea and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1945-1950p. 36.



요즘 나라가 시끄럽고 경제가 어려워 사는 것이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많다. 개인적으로도 복잡한 일이 많았는데, 지난 주에 가까운 후배가 강원도 속초에서 휴가 보내고 있는데 바다 바람을 쐬러 오라고 해서 주저 없이 속초행 고속버스를 타게 되었다. 출퇴근 하면서 매일 지나다니는 강변역 동서울터미널에 가서 속초행 막차를 탔다. 서울은 날씨가 맑았지만 강원도 접경에 접어들면서 안개가 끼었고 대관령을 넘어가자 비가 오기 시작했다.

그날 밤 파도가 쉼 없이 부서지는 속초 해변에서 밤 하늘의 초롱초롱한 별을 보면서 캔맥주 한잔 하려는 계획은 무산되었다. 대신 파도 소리가 들리는 해변 횟집에서 제철인 오징어 회에 병맥주만 마셨다. 해변이 아닌 횟집에서 술을 마시게 되어 처진 기분도 이런저런 세상사는 이야기 속에 사라져 버렸다.‘마음 속의 부처라고 세상의 모든 행복과 고통, 걱정이 모두 내 마음에서 출발하는 것 같다. 새벽녘에 해변을 거닐면서 거칠어진 해변의 파도소리 속으로 근자에 가졌던 근심을 실어 보냈다. 가끔씩 자연 속으로 돌어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는가 싶다.

다음 날 새벽부터 비가 내렸지만 간밤의 숙취를 해소하기 위해 속초의 명물인 곰치로 끓인 곰치국인, 물곰탕을 먹으러 갔다. 20여 년 전 속초에 머물렀을 때 자주 먹으러 갔던 속초 시장의 단골집을 찾아 갔지만 없어졌다. 시장 아주머니에게 물어보니 요즘 곰치가 안 잡혀서 시장통에 있던 집들은 전부 문을 닫았다고 한다. 동명항 근처에 전통식으로 곰치국을 하는 집이 있다고 해서 사돈집(033-638-0915)’이라는 곳을 찾아갔다. 이미 가게 안에는 간밤의 술에 찌든 주당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벽에는 물곰탕을 예찬하는 지역 시인의 글이 걸려 있었다. 속초 인근에서 초등학교 선생님을 했다는 시인도 나처럼 술을 좋아했는지 시원한물곰탕의 매력을 잊지 못한 듯 구절마다 찬양 일색이다.

곰탕을 한 그릇 시원하게 비우고 나니 기분이 개운해졌다. 관동팔경이라는 청간정에도 올라보고 영랑호 근처 바위에도 올라가 보고 숲 속을 산책도 하였다. 속초는 20년 전과 비교해서 단지 청초호에 다리가 생긴 것을 빼고는 발전된 곳이 하나도 없어 옛 기억을 더듬어 찾아갈 수가 있었다. 속초의 매력은 산과 바다가 같이 있다는 것인데, 구름과 해무에 뒤덮힌 설악산은 흔적조차 볼 수가 없어 아쉬움이 남았다. 미시령 옛 고개길을 넘어면서 속초 해안을 다시 보고 싶었지만 해무로 인해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고개를 넘자 날씨는 다시 맑아졌고 간밤에 비도 오지 않은 듯 전혀 딴 세상이 되어 있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30년 이상 공직에 계시다가 정년퇴직하여 강원도 인제 버스터미널 앞에서 하늘 내린 황태구이집(033-461-5400)’을 하시는 옛 지인을 만나러 갔다. 90년대 초반에 속초에서 머물 때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니 20여 년 만에 만나게 된 것이다. 진부령 고개에서 말리는 황태가 일품인데 요즘은 중국에서 말린 황태도 들어오고, 러시아에서 말린 황태까지 강원도 골짜기에 들어온다고 한다. 중국산은 흙 냄새가 나고 러시안산도 약간 묵은 내가 난다고 하는데 먹어보지 못했으니 구분을 할 수는 없었다. 상위에 오른 각종 산나물과 야채는 직접 산에서 손수 채집하였거나 재배한 것이라고 했다. 취나물이며 두릅 등 각종 산나물과 텃밭에서 재배한 야채로 만든 반찬과 강원도 청정쌀로 지은 밥이 새하얀 이천 도자기에 담겨서 배고픈 나그네를 정갈하게 맞았다. 정성이 깃든 진수성찬으로 잘 대접받았다. 직접 채취하고 재배한 산나물과 야채로 상을 차린다는 소문에 설악산 등산을 다녀오는 등산객 일행들이 방은 가득 메우고 주인장과 산 얘기를 하느라 부산하였다.

복잡하고 삭막한 서울에서 살면서 고향 지리산을 항상 그리워하지만 멀다는 핑계로 잘 가지 못하는데, 이번 여름에는 꼭 한번 가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인공미가 가미된 것보다 풋풋하고 세련되지 못하지만 자연 그대로가 좋고, 번잡한 도심보다는 한적한 시골이 더 마음에 든다. 그 분도 강원도 인제가 고향은 아니지만 젊은 시절의 추억이 깃들어 있고, 그 곳에서 자란 자식들의 고향이니 사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된다. 20년 전의 코흘리개 아들은 벌써 결혼을 해서 아이를 둘씩이나 두고 원통에 살고 있었다. 새삼 세월의 빠름을 실감하게 된다. 간만에 정신이 맑아지고 유익한 강원도행이 아닌었던가 싶다.



인간사는 정치의 연속이라고 볼 수 있다. 조직이 크던 작던, 어떤 목적에서 모인 조직이던 내부에서 유∙무형의 갈등과 투쟁이 일어난다. 누구나 갖고 싶어하는 자원, 즉 부, 명예, 권력은 한정되어 있거나 공평하게 나누기 어려운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냉혹한 정치의 속성을 잘 표현한 서양의 사상가는 마키아벨리이고, 동양에서는 중국의 한비자라고 한다. 특히 한비자는 춘추전국시대의 유명한 사상가로 법가적 처세론에 기초하여 권력의 본질을 서술하였다. 한비자가 제시하는 지도자의 자질인 7가지 리더십을 알아보자.

 

첫째 지도자는 자신과 싸워 이긴다. 훌륭한 지도자는 자신의 감정에 좌우되지 않고 자기 통제를 잘 해야 한다.

둘째 지도자는 상황을 탓하거나 변명을 하지 않는다. 어려운 여건이라도 극복해야 하는 도전으로만 생각한다.

셋째 지도자는 세상의 모든 지혜를 빌린다. 자신만의 머리와 지혜를 믿어서는 한계에 봉착하므로 개방된 사고로 세상의 모든 지식과 주변인의 조언을 받아 들인다.

넷째 지도자는 불확실성 속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는다. 미래는 불확실할 수 밖에 없다. 지도자는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길을 개척하고 제시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다섯째 지도자는 부하의 충성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지 않는다. 훌륭한 지도자는 부하의 충성을 요구하는 대신 문제를 풀어 낼 재능을 가진 사람을 중용하여 그 능력을 활용한다.

여섯째 지도자는 어려움을 피하지 않고 맞선다. 어려움을 피한다고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최선을 다해 해결한다.

일곱째 지도자는 마지막까지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진다. 일을 수행함에 있어 동료와 추종자가 있지만 결국 혼자서 책임을 져야 한다. 지도자는 고뇌와 책임을 누구와도 나눌 수가 없다.

 

위의 7가지 요건을 충족시키는 훌륭한 지도자가 되기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기업이나 조직, 국가의 지도자들은 최소한 위 항목 중 몇 가지라도 충족해야 하는데 한가지도 가지지 못한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현재 미국발 금융위기가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와중에 특히 한국 경제가 더 큰 영향을 받고 있어 국가 지도자의 리더십 발휘가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다. 단순히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등 정치인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모든 부문의 지도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갖춰야 하는 요소이다.

21세기는 국가의 경계와 개념이 모호해지고 국가간이 아니라 기업간 경쟁이 심화되고 있어 기업 경영진에 더 요구하는 자질일 것으로 본다. 외부환경이 급변하고 경영여건이 악화되는 시기일수록 더욱 경영자의 역량이 중요하다. 상황이 어렵다고 불평하지 않고 주변 참모들의 조언과 전문가들의 지식을 바탕으로 올바른 방향만 수립한다면 난국을 헤쳐나갈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아랫사람들의 맹목적인 충성에서 조직 효율성을 이끌어 내는 것이 아니라 적재적소에 인재를 발탁하여 중용하는 것이 인재관리의 핵심이 되고 자신이 선택하고 실행한 모든 행위에 대해서는 끝까지 책임을 지는 자세가 필요하다.

수 천년 전의 논리이지만 사람 사는 방식과 논리는 전혀 변하지 않아 귀담아 들을만하다. 현재 한국 경제가 어렵다고 난리이고 내년에는 더 어려울 것이므로 마음을 준비를 단단히 하라고 하는 이야기가 많다. 사실 한국의 지도자들이 해야 하는 일은 알려진 위기를 증폭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지혜를 모아 어떻게 위기를 수습하자는 방향을 국민들에게 제시하고 당파를 초월하여 이 난국을 수습할 수 있는 역량 있는 인재를 중용하는 것이다. 현재 이 단순한 해결책조차 찾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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